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Lotto

하 나.
무슨 황당한 꿈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가 살던 동네에서 나를 더 이상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곳에서 나를 몰아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나를 항상 못마땅하게 여기시곤 했다. 시골학교 교장이라는 직책이 아들놈을 외지로 추방시키고 만 것이었다.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나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신념이 고향에서 사춘기를 잘 보내고 있던 나를 전장 같은 곳으로 보내게 된 것이었다. 매사가 그러했다. 시키니까 그에 따라야 하는 식으로. 서울의 냉혹함을 시골 촌놈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시골에서 배운 나의 모든 것이 일시에 부정을 당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중요시하던 알량한 동창들. 동창도 수준이 맞아야 동창이지 나 같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는 전학 온 그날부터 사정이 다르게 마련이다. 적응이라는 단어는 본능과는 다른 것이었다. 세월의 떠밀림으로 어떻게든 고등학교는 끝마쳤다. 시골 촌놈이 서울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아버지는 대견스러워 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에 시작된 것이다. 대학. 대학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시골 아이들과 서울 아이들의 실력은 재 보지 않아도 이미 판정이 날 정도였다. 숱한 과외를 통해 다듬어진 서울 아이들은 역전의 용사와 다름이 없었다. 비록 서울에서 졸업장을 받았지만 실력은 시골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나로서는 최초의 관문을 통과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와 다름이 없었다. 제길 헐. 전 후기 대학에서 어려움 없이 떨어지고 나서 나는 20만을 헤아리는 재수생들의 동지가 되기로 했다. 재수생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재수 더럽게 없게 말이다. 기본 실력이 부족하니 일년 내에 쉽게 변할 것도 없었다. 전 후기 대학을 또 한번 쉽게 극복하고 말았다. 그 지옥의 문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여유도 없었다. 전문대학이라도 적을 두지 않으면 한 많은 세상을 뒤로하고 군대에 끌려갈 판이었다. 지금 생각 해보면 그때의 얼마간이 내 인생의 흥망을 결정지을 수 있는 가장 귀한 나날들이었다. 하숙방 구석에 쳐 박혀 책과 씨름을 한지 보름만에 한판 승. 어렵지 않게 전문대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학생으로의 복귀는 절망에서 벗어난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호텔 경영 전문 대학의 빛나는 훈장을 가슴에 달고 나는 다시 속세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찔하고 눈앞이 깜깜했던 그 절망감. 군대로 끌려갈 뻔했던 위기의 순간들. 얼마나 오래갈는지는 모르지만 당분간이라도 유보의 시간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대학도 대학 나름이라는 상식을 실감하고 나서 하루하루의 나날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2류 인생의 시작이 바로 그때부터였는지 모른다. 미팅을 나가도 번지르한 계집들은 항상 일류대학의 사내놈들 차지였다. 버스를 타도 차장들이 먼저 알아보고 위아래를 훑어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호텔 경영이라는 것도 그러했다. 일류대학 출신들이 경영을 하는 것이지 전문대 출신의 우리들은 노동 전선에 앞장서는 것으로 족하였다. 세상은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렇게 굴러갔다. 2류나 3류에게는 설자리를 제공하지 않는 완벽한 폐쇄성.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살아왔다. 언제부턴가 내게 주어진 유보의 시간들이 도리어 나를 옭아매는 부메랑이 되고 있었다. 세상의 편견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한 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자 곧 영장이 날아왔다. 군대에서도 힘없고 빽 없는 놈은 언제나 전방 배치와 뺑뺑이밖에 없었다. 고달픈 2류 인생은 언제나 몸으로 떼우는 것이었다. 돈 있고 학벌 좋은 놈들은 몸으로 떼울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 나름의 처세술로 세상은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군에서 3년이라는 세월은 저절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조직-내가 배치된 부대-에서는 2류 취급은 받지 않았던 것. 시간이 쌓아준 계급의 계단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그 계급에 의해 대우를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곳에는 촌놈이나 서울 놈의 벽이 있을 수 없었다. 다만 고참과 졸병이 존재할 따름이었다. 찬란했던 나의 말년이여! 벽돌 네 개를 어깨에 올려놓는 순간 나는 졸따구들의 우상이었고 내무반의 황제였다. 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들. 내 인생의 찬란한 황금기. 시간이라는 거인이 나를 밀어내어 그 왕좌를 누군가에게 물려주어야 했다. 편견과 냉혹의 현실, 곧 2류 인생의 연속극 후편이 내 앞에서 나를 기다릴 뿐이었다.
시골에서 살 때 똘똘한 계집애가 하나 있었다. 공부도 어지간히 잘해서 서울의 일류 여자대학의 훈장을 달고 다니던 그 아이. 제대 후 그 계집의 하숙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 아이를 찾아간 이유는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 달라는 억지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정색을 하며 거절하던 그 아이도 나의 찰거머리식 각개 전투를 격파할 정도로 매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한 다리 건너 누군가를 소개해 주었다. 시중은행의 창구에서 일하는 여자라고 했다. 우선 돈을 만진다니 그리 싫지는 않았다. 고참 말년부터 길렀던 솜털 머리가 어느 정도 자리잡아 가던 터라 외모로는 나도 빠지지 않는 편이었다. 한여름 종로의 다방에서 그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시원한 에어콘이 작동되고 있었다. 약속 시간 10분이 지나자 조그만 체구의 그 아이가 그녀를 데리고 들어왔다. "만규씨 인사해. 영실이야.""만규라고 합니다. 성은 강이구요.""처음 뵙겠습니다. 한영실 이예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실씨!"서로의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그 아이는 자신의 역할도 끝났다는 식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영실이라는 여자가 치마를 붙들어도 가볍게 뿌리치며 사무적인 웃음을 보이고 사라져 버렸다. '못된 것. 앉아서 분위기라도 잡고 갈 것이지. 누가 자기한테 찻값이라도 내라 그럴까 봐 꽁무니를 빼!' 우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자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은영이랑 잘 아는 사이인가 보죠?"
"예.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사입니다. 은영이 아버지와 제 엄친은 직장 동료이기도 합니다."
"은영이 아버지는 선생님으로 알고 있는데 만규씨 아버지도?"
"제 아버님은 그 학교 교장이시지요."
"교육자 집안 이시군요."
"아버지만 교장이지 뭐, 교육자 집안이라고 하기는..."
"겸손하시군요."
"은영이 얘기로는 은행에 근무하신다고 하던데?"
"ㅅ은행 종로 지점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멀지 않은 곳에서 일하고 계시군요."
"만규씨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지요?"
"군에서 막 제대한 복학을 기다리는 실업자입니다."
"학생이시군요."
"실망 하셨습니까?"
"아니요."
"왠지 그렇게 들렸거든요."
침묵의 어색함을 깨고 이야기하는 동안 종업원이 와서 차를 주문하라고 한다.
"뭘 드시겠습니까? 영실씨!"
"커피"
"그러면 커피 둘."
주문을 받자 종업원은 말없이 사라진다.
"앞으로의 계획은 정하셨나요?"
이 여자 초면에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처음 만난 사이에 당돌하게도 어떻게 살겠냐고 묻고 있는 것이었다. 당황하기도 하였지만 부화가 나서 '되는대로 살겠다. 왜?'라고 대답하려다가 왠지 솔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변치 않은 사람 만나서 시간낭비 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당당함이 나를 위축시켰다. 섣불리 보였다가는 큰 코 다칠 것 같았다. 정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가 나를 달래듯 거들기 시작했다.
"부담 갖지 마세요. 복학할 때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은 것 같아서 무슨 일을 계획하고 계신가 해서 물어본 것뿐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아직 특별한 계획은 없습니다. 사는 것이 계획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원대한 꿈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거든요. 그냥 밀리지 않고 열심히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만규씨 형제분은 어떻게 되지요?"
"2남 1녀 중 장남입니다. 영실씨는?"
"딸 셋 중에 둘째예요."
"생활력이 강하겠군요. 첫째랑 막내 사이에 끼어 생활하다 보면 생존력이 강해진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사실 그런 점이 없지 않거든요. 낮에는 은행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 다니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생활비와 학비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편이지요."
그녀는 물어보지도 않은 것까지 자랑삼아 담담하게 뱉어내고 있었다. 은행이니 야간 대학이니 그런 악착같은 구석이 쉬운 여자 같지는 않았다.
"대단 하시군요. 남자들도 감히 흉내내기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과찬 이예요. 다들 그렇게 사는데요. 뭘..."
'-다들 그렇게 산다고?'나는 이 말에 위압감을 느꼈다. 체구는 작은 여자가 당찬 소리를 골라서 하는 것이었다. 남자라는 사회적 우월감이 일순에 허물어지고 있었다. 2류 인생과 일류로 상승하려는 인생의 차이점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제길 헐. 어려운 여자를 만났구나.' 나는 그녀의 계획을 묻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영실씨는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는 겁니까?"
"비록 야간 대학이지만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갈까 해요. 그 동안 모아 놓은 돈으로 넓은 세상도 구경하고 여자도 사람 대접받는 곳에서 한번 멋지게 살고 싶어요."
"대단한 꿈을 갖고 계시는군요."
"만규씨는 미국에 가보고 싶지 않으세요?"
"가고야 싶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입니까? 머리는 둘째치고 경제력이 없으면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데 나 같은 촌놈이 어떻게 그런 꿈을... 설령 비자를 받는다 해도 시골 학교 교장의 월급으로 그런 돈을 어떻게 만들어 내겠습니까?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요.""그런 식으로 포기하지는 마세요. 미국이 천국은 아니지만 목표를 정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길이 열릴 거예요. 천주님도 그렇게 무정하시지는 않거든요."
"성당에 나가십니까?"
"오래 되지 않았어요."
"그래도 믿음이 있어 보이는군요."
"늦게 얻었으니 열심히 쫓아 다녀야지요."
"시간이 별로 없으시겠군요. 직장, 학교, 성당?"
"항상 쫓겨다니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서 기뻐요. 화요일은 강의도 없고 해서 만규씨를 만날 수 있었던 거구요."
"화요일이 아니라면 나오실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어쩌면..."
숨김없이 내키는 대로 말하는 그녀에게 뭔지 모를 흡인력이 있었다.
"황금 같은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귀한 시간을 답답한 실내에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커피 다 마셨으면 밖으로 나가지요?"
"좋아요. 하루 종일 은행에 쳐 박혀 있으면 세상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모처럼 시내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럽시다."
우리는 답답한 다방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왔다. 종로 2가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걸어 내려갔다. 퇴근 시간의 인파로 거리는 붐비고 있었다. 서로의 어깨를 맞부딪치면서 시간에 쫓겨다니는 사람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무표정했고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들 속에 섞여서 살아야 하는 일상이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빌딩 윈도우에 반사되는 나의 모습. 어깨가 축 늘어진 모습이 힘이 없었다. 영실이라는 여자. 작은 체구의 그녀가 생각보다 당당해 보였다. 걷는 것도 힘이 있었다. 비각을 돌아서 지하도로 내려갔다. 우리는 작정이라도 한 듯 걷고만 있었다. 다방 안에서의 대화가 장소의 이동으로 인해 전부 끊겨 버린 듯 했다. 생각이 많아진다. 한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끝없는 도전. 삶의 도전. 반면에 나는 무엇인가? 당차지도 못하고 사람들과 잘 섞여 지내지도 못하는 성격이 나를 패자로 만들 것이 분명했다. 미국? 영화를 보면서도 갈 수 없는 나라로 생각했던 그림 속의 풍경들. 머릿속에 물집이 생긴 것처럼 자꾸만 같은 생각을 하게된다. 제길 헐."만규씨! 시장하지 않아요?"세종문화회관 앞에 와서야 영실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픈 것도 같고..."
"고픈 것도 같고라니...무슨 남자가 그렇게 희미해요. 끊고 맺는 것이 부족한 것 같아요. 만규씨는!"
괜한 소리를 해서 핀잔만 들었다. '아니 이 여자가 보자 보자 하니까...' 그러면서도 나는 다시 말을 고쳐 그녀에게 대꾸를 하였다.
"아닙니다. 배고프지 않군요."
"제가 잔소리해서 마음을 바꾸셨군요. 사과하는 뜻으로 저녁은 제가 내겠어요."
완전히 가지고 놀았다. 당찬 정도가 아니라 말도 제대로 못 꺼낼 정도였다.
"정 그러시다면 맥주나 한잔 사십시오."
"저녁은 제가 낼 테니 맥주는 만규씨가 사세요. 처음 만난 날부터 여자가 술대접 하면 버릇, 아니 습관이 될지도 모르거든요."
"영실씨는 정말 분명하시군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여자가 이렇게 나오니 꺼릴 것이 없었다. 나의 좁은 마음으로도 그녀와 교화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저녁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기대하지 마시고... 낙지 볶음이 어때요?"
"좋습니다. 얼큰하고 짜릿한 낙지 볶음이야말로 저녁상에는 일품 아닙니까? 그리고 영실씨 성격처럼 앗싸한 데가 있으니 그만이지요."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뒷쪽을 돌아가서 낙지볶음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 가운데는 우리 나이 또래 들도 많았다. 빈자리가 날 때까지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음식을 주문하자 먹음직스러운 낙지볶음이 곧 나왔다. 보기에도 군침이 돌 정도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까닭에 식사를 하고 노닥거릴 여유도 없었다. 밥그릇의 밥풀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치우자 어느새 알아채고 종업원이 와서 식탁을 치워 버린다. 식당에서 떠밀려 나오듯 빠져나왔다. 사방을 둘러보니 술집 투성이였다. 우리는 문화의 전당 주위에서도 술 권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 같다. 복잡한 사회의 일상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제일 가까운 생맥주 집으로 들어갔다. 여기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우리는 구석 자리를 찾아서 겨우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나는 갈증도 나고 매운 음식을 먹은 탓인지 곧장 카운터로 가서 1000cc 두개를 들고 왔다. 영실이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렇게 큰 걸로?"
"작은 걸로 시작하면 영 속이 차지 않아서..."
나는 궁색한 변명을 찾아 말을 얼버무렸다.
"저는 잘 못 마셔요. 그러니까 만규씨가 모두 마셔야 할꺼예요."
"그렇게 말하면 분위기 망치니까 입술이라도 축이십시요. 자- 건배!"
"건배!"
"어떻습니까?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까? 맥주는 처음 들이킬 때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적당히 마시고 실수를 하지 않으면 나무랄 일도 아니지요. 만규씨도 초면에 술 때문에 실수하시면 애프터는 없을 거예요! 남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술을 마시려고 해서 십중팔구는 실수를 하게 마련이지요. 혹시 만규씨가 그런 분이라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자리를 일찍 뜨는 편이 서로에게 좋을지도 몰라요."
"알겠습니다. 오늘은 과음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찬물 끼얹는 소리는 그만 하십시요. 이거 영 썰렁해서 술맛이 안 납니다."
"미안해요. 제 생각만 하다보니..."
"우수께 소리 하나 할까요?"
"......"
"술 가운데 가장 달콤한 술이 뭔지 아십니까?"
"술도 잘 못 마시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한번 추측해 보세요."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바로 '입술' 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영실씨의 입술은 더 달콤할 것 같습니다."
"만규씨는 엉큼한 구석이 있는 분이군요."
영실은 맥주 몇 모금으로 경계가 풀렸는지 손바닥으로 내 무릎을 치며 눈을 흘긴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서로의 방어막을 허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자라온 이야기 그녀가 자라온 이야기. 우리는 서로의 경계를 풀어헤치고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밤이다. 영실의 얼굴을 쳐다본다. 붉게 타오르는 두 볼을 숨기려는 듯 두 손을 볼에 가져간다. 가슴이 답답한 듯 큰 숨을 내 뱉는다. 작은 몸놀림 하나 하나에도 조심이 가는 듯 공연히 옷매무새를 새롭게하고 아래만 쳐다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그녀가 마침내 조용히 말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않아요. 거리나 직장에서 마주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자기의 것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하는 것 같지 않아요. 가까워진 듯 하면 이내 본성이 드러나서 소유하려고만 들고 혹 소유하였다 치면 이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이 많아요. 결국 사람을 만날 때도 어느 정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나가야 가능한가 봐요. 이런 생각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숨막히는 일이 예요. 그래서 당돌한 질문을 하고 도전적으로 보이려고 했던 거예요. 만규씨가 저를 이해해 줄 수 있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만규씨를 만나니 이제까지의 생각과는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혹시 제 행동이 무례했다거나 만규씨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사실 제 성격은 굉장히 여린 편이거든요."
"그렇게 느낀 점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당돌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솔직하고 숨김없는 영실씨의 본심을 알고나서는 별 문제가 안되더군요. 그것보다 문제가 있다면 제 쪽이 더 많을 겁니다. 별 볼 일없는 제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만규씨에게서 다른 점을 찾았거든요. 보통 남자들처럼 허세를 부린다거나 좋은 말로 상대를 현혹하려 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만규씨는 그런 점에서 남들보다 순수한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좋은 말벗이 되어서... 시골을 떠난 뒤 한동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서울 놈들은 이해 관계가 아주 분명해서 자신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 싶으면 거들떠 보지도 않거든요. 시작부터 함께 한 것이 아니었으니 외부로부터의 이주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춘기에 말상대를 찾지 못하고 지내다보니 철저한 고립 속에서 서울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아주 되게 당한 셈이지요. 그렇게 살다보니 말수가 많이 줄어든 겁니다. 많은 것을 쉽게 포기하고 포기하다보니 자신을 2류로 전락시킨 꼴이 된 겁니다. 대학도 결국 마찬가지...."
"만규씨.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세요. 자신의 잠재능력을 과소평가 하면 언제나 당하는 쪽은 만규씨 밖에 없어요. 제 생각으로는 만규씨가 자신을 테스트 해볼 기회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어두운 환경에 눌렸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정서적으로 불안했고 자신감을 상실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영실씨는 저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여자라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여자라는 것이 결코 불리한 것만은 아니지요. 여자끼리 경쟁하는 것이 도리어 저에게는 유리했던 것 같아요. 신체적으로는 불리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면 남자들 사이에서보다 쉽게 인정받을 수 있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미국 유학의 꿈은 언제부터?"
"오래 되지 않았어요. 은행 선배가 모범을 보여 줬거든요. 나는 그 언니의 삶을 흉내내는 것에 불과해요. 고등학교 2년 선배인 그 언니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줬어요. 자신의 운명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면 언제나 패배자의 모습만 인정하게 된다는 거예요. 여자라고 해서 주저앉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으로 떠났나요?""지난해 가을 뉴욕으로 떠났어요. 혼자서 유학 준비를 하다가 서울을 방문한 교포 청년과 결혼을 했거든요. 그 언니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목표를 정하고 기회를 살피면 그 해결책이 다른 곳에서 튀어나오곤 했거든요. 그 언니 참 대단 하지않아요?"
"세상 어느 곳에서도 열심히 살 것 같습니다. 들풀 같은 생존력으로 말입니다."
"만규씨! 우리도 열심히 살도록 해요. 한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게 말이에요."
"될 수 있으면..."
내 술잔은 이미 바닥이 보였다. 영실은 자신의 술잔을 내게 슬쩍 밀면서 말한다.
"이것만 마시고 그만 가요.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 가져버리면 아쉬움이 없거든요. 그러면 재미가 없어요."
"영실씨 말이 맞습니다."
영실의 술잔은 달콤했다. 그녀의 입술을 간접적으로 만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여인을 만나는 것이 이렇게 쉬울 수 있을까? 마치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늘의 만남은 자연스러웠다. 분명한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 많은 힘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입가에 뭍은 거품을 닦아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웃음이 멋져요."
"그래요? 너무 좋게만 보지 마십시오."
"하하하-"
영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녀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리를 뜨기로 했다. 그녀가 내 등뒤로 한마디한다.
"고마와요. 고집부리지 않아서."
"동생 취급 그만 하십시오. 그만 하면 된 것 아닙니까?"
"하하하-"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술집을 나왔다. 여름밤의 별들이 유난히 많아 보인다.영실의 몸에 숨어있던 향수 냄새가 휙 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진다.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그녀를 안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있었다. 물결 같은 사람들의 움직임. 문화회관에서 공연이 끝났는지 한 무리의 인파가 빠져나온다. 그 물결이 나의 달콤하고 격정적인 생각을 흩어놓고 만다. 그때 영실은 오늘 만남의 끝을 선언하듯 간단히 말한다.
"만규씨! 제 버스는 여기에서 서요."
"차라도 한잔 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저축해 두세요. 은영이를 통해 제가 연락할께요."
야속한 버스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영실은 나에게 손을 흔들며 버스로 달려간다.
"안녕-"
멋쩍게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하고도 그녀의 버스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그곳에 서있었다. 여름 밤. 좋은 밤. 잠시 헤어짐.



둘.
대학으로의 복귀.고향에 내려가 집안 일을 거들다보니 거인 같던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위축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년을 몇 년 앞둔 아버지는 매사에 초조함을 보이셨고 때로는 넋을 놓고 계실 때도 있었다. 동생과 나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며 내년이면 대학에 진학할 막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도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정년퇴직은 우리 부모에게 불치의 병과 다름없는 현실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일년이었지만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앞으로도 5년을 고생하셔야 한다. 이 시점에서 나의 복학은 전과 같을 수가 없었다. 3년간의 군 생활도 그랬지만 집안의 환경 변화가 나를 보다 현실적이고 책임감 있는 장남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실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변하게 되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취급하던 더 이상 과거와 같이 살수는 없었다. 2류 인생으로 끝나기에 나의 남은 세월이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라는 것도 내가 덤비기에 따라 반응이 다를 것 같았다. 내게는 적극적으로 삶에 도전해야 할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복학 첫날부터 과거의 자신과는 달라지려고 철저히 노력했다. 강의실에 남들보다 5분 먼저와서 기다렸고 교수들 말씀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변화였다. 남의 눈에 띠지 않으려고 구석을 찾던 내가, 되는대로 살자며 자포자기했던 내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변화를 먼저 발견하고 대견스러워 하시는 분들은 바로 교수들이었다. 학기말이 되어 현장 실습을 할 때 일류 호텔로 나가게 된 이유도 나의 변화를 지켜본 교수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내 삶에 최초로 일류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었던 그 순간의 감격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이었다. 나 하기에 따라서는 졸업 후 정식 직장으로도 가능할 것 같았다. 내게도 기회가 열리는 듯 싶었다. 호텔에서 일하게 되니 영실이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녀의 근무처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퇴근 후 만나는 것이 부담되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녀의 적극성에 나도 많이 동화되었고 나의 솔직함에 그녀 자신을 아낌없이 내게 주었다. 한 달에 한번쯤은 잠자리도 같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어느 정도 믿고 있었다. 서로를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신파극 같은 끝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영실의 월급이 내 쥐꼬리보다는 훨씬 많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돈으로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월급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리어 영실이의 능력이 내게 커다란 위안이 될 정도였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는 것은 곧 자신감이요 고마운 세상을 말하는 것. 몇 달 전의 자신과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축 늘어졌던 어깨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고 불만뿐이던 현실에 만족을 찾게되었으니 대단한 변화였다. 영실은 나의 변화를 보고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고 해어질 때는 언제나 새로운 말을 찾아내어 내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을 잊지않는다. 그런 영실이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왔다. 2년제 교육의 전문학교는 너무 짧은 기간에 모든 것을 끝내는 속성 과정이다. 대학 문을 들어선 것이 엊그제 같더니 벌써 문밖으로 나가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대학을 졸업한다고 하니 시골의 친척들이 모두 몰려와서 졸업식장은 장터로 변하였다. 대단한 졸업장을 받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아버지의 체면을 봐서 찾아온 친척들도 있었다. 식장에서 영실의 모습을 찾았으나 눈에 띠지 않았다. 영실을 부모님께 보여드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했는데 영실이 보이지 않았다. '은행을 빠져 나오기가 힘들었나?'. '부모님과 많은 친척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이 부담이 되었나?'.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졸업식장을 빠져나와 그 많은 무리를 이끌고 식당을 찾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 근처의 식당들은 모두 만원이었다. 우리는 차라리 시내의 식당에서 만나기로 하고 사람들의 물결을 피해 흩어졌다. 시내의 식당들은 학교 근처의 그것들보다는 비교적 한가한 편이라서 자리를 잡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는 꽤나 흡족해 하셨다. 장남으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되어 한시름 놓았다는 것이다. 졸업 후 밥벌이 할 직장이라도 있는 것이 대견스러우신 것 같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원하시던 서울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학교와 운이 없던 나의 문교부 시대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시원섭섭했던 학창시절. 시골을 떠나 어렵게 유학하던 많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이방인으로 보냈던 고등학교. 대학에 두 번이나 떨어져 숨도 제대로 못 쉬며 지내던 재수시절. 그리고 전문학교와 군 생활의 기억들. 바로 엊그제 일어난 것 같던 그 기억들이 새삼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제부터는 유보의 기간도 없을 뿐더러 시행착오의 관용도 없을 것이다. 냉혹한 현실에서 정면 승부를 벌여야 하는 전장만 있을 뿐이다. 갑자기 불안이 엄습하였다. 자신이 없었다. 영실의 얼굴이 눈앞에 떠오른다. 그녀가 내 어깨를 다독거리며 격려를 하는 것 같았다. 고마운 여인. 순간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스스로 다짐을 하였다. '까짓 것. 한번 부딪쳐 보는 거야!'
저녁에 영실을 만났다. 그녀는 반갑게 나를 안으면서 말을 했다.
"졸업 축하해!"
"고마와 영실이. 그런데 낮에 빠져 나오지 못할 정도로 바빴나 봐?"
"미안해. 신임 대리가 여간 깐깐해야지! 근무 중에 자리를 비워야하는 합당한 이유를 대라는 거야. 하도 치사하게 굴어서 그냥 주저앉아 근무했어. 그리고 만규씨 가족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부담이 많이 갔는지 하루 종일 두통 때문에 적지 않게 고생했어. 어른들 뵈면 조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살다보면 별 일이 다 있군. 천하의 한영실이?"
"놀리지 마 만규씨! 정말 부담이 되었어."
종각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광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겨울 냄새가 남아있는 초봄의 바람이 여간 매섭지 않았다. 몸을 떨고있는 영실의 어깨를 감쌓아 보았다. 보드랍고 감촉이 좋았다. 그리 두텁지 않은 옷으로 가린 영실의 살갗은 기름을 칠한 것처럼 언제나 윤기가 흘렀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이 기쁨이었다. 내 품속에 안겨 가쁜 숨을 쉬던 영실이 눈앞에 보인다. 입술을 깨물며 자신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영실.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사랑스러운 여자. 그녀가 나의 생각을 가르고 흥겨운 목소리로 말을 한다.
"만규씨! 오늘은 졸업 기념으로 한 턱 낼께. 춤도 추고 최고급 호텔에도 한번 가보고 싶어. 만규씨 호텔로 갈까? 손님으로 가서 대접을 받는 것도 좋지 않겠어?"
"기분 잡치는 소리 말어. 선배들도 많은데 어디 기분 나겠어?"
"그런가? 그러면 어디로 갈까?"
"재력가 한영실이 있으니까 남산으로 가는 게 어떨까? 오랜만에 산을 보고 싶거든."
"그러지 뭐. 오늘은 만규씨가 주인공이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지."
"고맙습니다. 한영실씨!"
"별 말씀을..."
"어쭈!?"
"하-하-하-"
광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장충동으로 갔다. 차창 밖으로 족발집의 간판이 수없이 지나쳤다. 갑자기 족발이 먹고 싶었다. 영실이도 내 마음을 읽었는지 내 손을 꼭 쥐었다. 우리는 기사에게 가까운 족발집 앞에 세워 달라고 했다. 우리는 원조 족발이라고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영실이는 자리에 앉자 마자 입을 열었다.
"겨우 족발이야?"
"우리 같은 서민은 서민의 낭만을 즐길 줄 알아야 해!"
"하기야 먹는 걸로 인생을 낭비하는 건 좀 아깝기도 해."
"인생까지 운운할 필요는 없고.""왜 시비야! 좋은 날에."
"그렇게 들렸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통촉하여 주옵소서-."
"하교를 내리겠노라. 앞으로는 진지해 질지니라."
"배고파 죽겠는데 어떻게 진지해 질 수 있습니까?"
"점점..."
"알았어."
"소주 할래?"
"웬 일이야? 술까지 시켜주고."
"오늘은 만규씨가 주인공이니까. 대신 술 취하면 안돼!"
"힘을 못쓴다 이거구먼."
"엉큼해서 그렇게 밖에는 안 들리지?"
"아니었나?"
"자꾸 그러지마. 아직 까지는 괜찮은 숙녀니까."
"미안"
영실의 토라진 얼굴을 보고 짓궂은 말을 멈추었다. 나는 미안하기도 하고 사랑의 표시를 하기 위해 그녀를 안으려 하였다. 그러자 영실이 정색을 하며 말한다.
"만규씨 왜 그래! 여기는 식당 안이야.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조심..."
"미-안"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족발 안주로 들이키는 소주는 별미였다. 영실이도 오늘만큼은 마다 않고 소주잔을두 번이나 비웠다. 기름기가 완전히 빠진 족발은 맛도 고소하고 부드러워 목구멍으로 쉽게 넘어간다. 오물오물 씹고있는 영실의 입술이 귀여웠다. 술이 퍼지기 시작한 영실의 두 볼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앵두보다 예쁜 색의 두 볼. 영실은 얼굴이 뜨거운지 두 손을 볼에 가져가며 입을 연다.
"앞으로 어떻게 할 꺼야?"
"특별한 계획은 없어."
"호텔에서 일하는 걸로 만족 할 꺼야?"
"그것도 어렵게 구한 직업이야."
"미국에 안 갈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
"그렇지도 않은가 봐. 남들은 쉽게 가는 걸."
"갑자기 왜 그래? 누가 또 미국에 갔나 보지?"
"아니야. 선배 언니한테서 편지 받았어. 미국에 언제 오냐고......"
"나도 가보고 싶지만 길이 있어야지."
"내년에 졸업하면 유학 시험 볼 꺼야. 이렇게 사는 게 낭비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갈 곳이라도 정했어?"
"그 언니가 학교 안내서를 보내줬어.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좋게 나오면 학교측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그래. 그러면 됐지 뭐!"
"자신 있어?"
"한번 해보는 거지 뭐! 기껏해야 시험인걸. 만규씨는 어떻게 할 꺼야?"
"지난번에 지나가는 소리로 언뜻 들은 적이 있는데 호화 유람선이 온다고 그랬어. 세계일주를 하는 유람선인데 미국에서 떠났다고 그러더라. 쉬쉬해서 그렇지 더러는 그런 식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
"한번 자세히 알아봐. 돈이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께."
"정말로 미국에 가고 싶은 거야, 영실이?"
"답답해서 그래. 한번쯤은 바깥 세상 구경하면서 살고 싶어. 짧은 인생 이런 도전도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아. 안 그래?"
"영실이를 보면 가끔 섬뜩해 지는 이유가 뭘까?"
"두려워?"
"두렵다기 보다는 한편으로 무모한 영실을 보는 것 같아 예사롭지 않거든."
"역마살이 껴서 그런가?"
"잘 모르겠어."
"너무 무거워지지 말아. 오늘은 기분 좋은 날 아니야?"
영실이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내게 술을 따른다.
"그래. 술이나 마시자."
"폭주는 금물이야 만규씨!"
"알았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아."
"미안."
술잔을 비우면서 영실이가 꿈꾸는 미국을 상상해 보았다. 마천루의 뉴욕. 영화의도시 헐리웃. 증권시장의 메카 월 스트릿. 흑백분규. 동성연애자들의 천국. 내가 알고 있는 미국은 단편적으로 조립하는 그림이 전부였다. 영실이는 왜 이런 미국을 그렇게 동경하는 걸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친척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세상에서 과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영실이는 미국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달라지고 사는 맛이 나는 것 같다.
"영실이는 미국이 그렇게도 가고 싶어?"
"뭔가 희망이 있을 것 같아."
"여기서는 희망이 없고?"
"한계가 있잖아!"
"어떤 한계?"
"답답해. 조그만 땅 덩어리에 갖혀있는 것 같아."
"미국에 가면 그런 현실이 달라질 것 같아?"
"어느 정도는..."
"그 어느 정도 때문에 여기보다 더 불확실한 미국을 택할 꺼야?"
"어차피 한 번 밖에 살지 못 하잖아."
"영실이 나한테 숨기는 것 있니?"
"무슨 비밀?"
"지난 과거 같은 것 말이야."
"다 알면서 왜 그래?"
"혹시나 해서..."
"그런 비밀이라도 있으면?"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아니야 그만 둘래."
"뭔데?"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영실에게 나와 미국 중 어느 쪽을 택하겠느냐고 물어 보려다 그만 두었다. 그녀가 혹시 미국이라고 답하면 그것도 낭패겠지만 나에게 자격지심이라고 나무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애꿎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그녀가 술을 따르며 조용히 말을 한다.
"만규씨! 마지막 잔이니까 이것만 마시고 우리 나가!"
"그래!"
"우리 춤추러 가자. 둘이서 간 적이 한번도 없지?"
"그런가?"
"어쩌면! 언제 우리 기분 내러 간 적 있었어?"
"그래. 영실이 말이 맞다."
나는 마지막 술을 입에 처넣었다. 기분도 그렇고 해서 취해보고 싶었지만 영실이가 춤추러 가자고 했으니 약속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초봄의 밤공기가 여간 쌀쌀하지 않아 코끝이 찡할 정도였다. 아직 아홉 시밖에 안되었지만 어둠은 대지를 덮은지 오래되어 포근하였다. 체육관의 둥근 돔(dome)이 눈에 들어왔다. 장충동 언덕길은 운치가 있어 좋았다. 영실은 밤기운이 찬지 내 몸속에 파묻혀 따듯한 체온을 나누고 있었다. 은은한 향수 냄새가 좋다. 비단결 같은 머릿결은 부드럽고 윤기가 있었다. 영실의 따뜻한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나의 입술에 가져갔다. 영실은 내게 자신의 모든 의사를 맡기고 있었다. 영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디스코텍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미여 터질 정도였다. 그래도 그 분위기가 싫지 않은지 영실은 들뜬 기분으로 미적대고 있는 내 손을 잡아끈다. 순간의 어둠이 나의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영실은 어둠을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요란한 형광 조명이 나의 시선을 자극하였고 빠른 템포의 음악이 고막을 터뜨릴 기세로 스피커를 빠져 나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쉼 없이 흔들리는 그림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젊은 아이들이 플로어 위에서 요란하게 흔들고 있었다. 우리는 웨이터가 마련해 준 테이블로 갔다. 영실이는 평상시의 모습과 달리 흥분되어 있었다. 어깨춤을 추며 이미 분위기에 빨려 들고 있었다. 춤이라는 것이 묘하긴 묘하였다. 사람을 쉽게 흥분시켜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고 있었다. 영실이 내 귀에 대고 무슨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만규씨! 안 나갈래?"
"한 잔 마시고 나서."
"그럴래?"
영실은 테이블 위에 있는 맥주병을 들어 우리 앞에 있는 빈 잔을 채웠다.
"만규씨 졸업을 축하해!"
"고마와."
"건배-"
"건배-"
시원한 맥주가 몸 속으로 흘러 들어가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우리 나가- 만규씨."
영실은 나의 손을 끌고 발 디딜 틈도 없는 플로어로 들어간다. '노는 일도 쉬운 것이 아니구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영실의 뒤를 쫓았다. 어색한 몸짓으로 손발을 놀리고 있자니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었다. 영실이도 나의 몸짓이 엉성하였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는다.
"만규씨!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니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흔들고 있는 중이야."
"너무 딱딱하잖아. 좀 부드럽게 해 봐. 이렇게 말이야."
영실은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이며 나의 춤을 바로 잡아 주었다.
"내 참- 춤에는 워낙 자신이 없어서..."
"좋아! 아까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워."
"그럴듯해? 춤도 별것 아닌데."
"자만은 금물!"
"막 자라는 사람 기죽이지 말아!"
"OK!"
"어쭈- 미국에 벌써 간 거야?"
"Y-E-S."
"춤추려고 미국에 갈 생각이었구나!"
"N-O."
"발음이 훌륭한데."
"Kidding?"
"진짜야."
"Thanks."
"......"
어둠 속에서 군무를 즐기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신분에 속해 있던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좁은 공간 속에서도 한 무리의 젊음이 되어 같은 땀을 흘리는 행위가 그들의 공감대였다. 제법 흔들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실에게 말한다.
"흔드는 것도 쉽지 않은데."
"왜?"
"온 몸이 땀으로 젖었어."
"그러면 내려갈까?"
"조금 더 있다가."
"맛들었나 봐. 만규씨!"
"운동 삼아 흔드는 거지 뭐!"
"운동?"
"그래. Aerobic."
"하-하-하-"
"왜, 웃겨?"
"웃기지 않아?"
"그런가?"
빠른 템포의 음악이 그치더니 부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로 미어 터지던 플로어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 뛰어 들어간다. 땀이라도 식힐 겸 자리에 들어가려 하니까 영실이가 등뒤에서 한마디한다.
"만규씨 죄진 것 있어?"
"아니!"
"그런데 왜 도망치려고 그래?"
"끝나지 않았어?"
"부르스가 나오잖아. 사람 민망하게 만들지 말고 내 손이나 잡아."
"알았어."
영실의 손을 잡고 멍청하게 서 있으려니까 영실이가 실망이라도 한 듯 말한다.
"분위기 좀 잡아 봐! 사람이 왜 그래? 무-드도 없게."
"어떻게 잡는 건데?"
"점-점!"
"알았어. 겁주지 말아."
나는 영실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고 플로어를 몇 바퀴 돌았다. 내가 생각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춤을 배워두는 건데...'
"만규씨-"
"응."
"어둠이 좋지 않아?"
"갑자기 무슨 말이지?"
"여자라고 해서 체면 차릴 필요도 없잖아."
"영실이가 언제 체면 같은 거 차린 적이 있나?"
"또!"
"그래. 영실이 말이 맞는 것 같아."
"싱겁기는..."
"좋아?"
"만규씨랑 같이 있으면 편해."
"사람 바보 만들려구?"
"아니 정말이야."
"영실이가 미국으로 달아나면 어떻게 하지?"
"또 미국 얘기!"
"포기했어?"
"아니!"
"음모라도 꾸미고 있어?"
"그런 말하지마. 오늘은 그런 생각 하고싶지 않아."
"알았어."
영실과 나는 플로어의 한 구석을 차지하여 어설픈 동작으로 어둠을 헤쳐나갔다. 조용하고 감미로운 음악이 두 곡이나 연이어 흘러나왔다. 나는 영실의 입술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도 붉게 타오르는 영실의 입술. 영실은 살며시 두 눈을 감는다. 나는 조심스럽게 영실의 입술에 나의 것을 얹었다. 촉촉이 젖어있는 영실의 입술에서는 스트로베리 맛이 났다. 나는 영실의 허리를 감고있는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영실의 몸이 자연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영실의 호흡이 가빠졌고 나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둠이 우리를 포근히 감쌓아 주었고 감미로운 음악은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영실이를 품에 안고 있으려니까 왠지 눈물이 나려한다. 나를 인정해준 최초의 사람. 나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여자. 그리고 처음으로 내게 사랑을 심어준 여인. 영실에게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영실이를 사랑한다. 이 여자와 일생을 함께 하리라.' 얼마 후 빠른 템포의 음악이 실내에 흐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음악이 바뀌기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순식간에 플로어를 차지했다. 우리는 이들에게 떠밀려 테이블로 가야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던 상태였고 갈증을 느끼던 차라 도리어 숨이라도 돌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시원한 맥주가 아직도 몇 병 남아있었다. 나는 맥주병을 들어 영실과 나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잔을 부딪치며 기분을 내었다.
"영실이! 나 같은 놈 만나서 후회하지 않아?"
"지금 자학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때때로 영실이가 내게 벅차다는 생각이 들어. 나 같은 2류 인생에게 사실 영실이는 과분하거든.""좋은 말로 들리지 않는군요. 내게 싫증이라도 난 거예요?"
"그런 소리하면 천벌 받지!"
"그러면 곱게 간직하세요. 버리지 말고..."
"영실이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지?"
"그런 일없을 거예요. 만규씨나 절개를 지키면 돼요. 요즘 남자들은 워낙 ...."
"그런 거라면 자신 있어. 하여튼 고마와 영실이!"
"또 그런 소리!"
"......"
밤이 자정으로 넘어가자 사람들의 물결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웨이터를 불러 팁을 두둑이 쥐어주며 호텔 방을 부탁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흘리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귀엣말을 한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고급 카펫이 깔린 복도 끝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플라스틱 열쇠로 문을 열고 인사를 한 다음 말없이 사라져버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럴듯한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남산의 윤곽이 선을 긋고 있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던 산이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창 밖을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고 영실은 그사이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산정의 방송탑은 빛을 던지고 있었고 아직도 잠들지 않은 거리에는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불빛이 지나쳐 갔다. 담배를 태우고 나서 욕실로 가려고 뒤를 돌아보니 언제 나왔는지 영실이 침대 위에서 머리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나와 눈빛이 마주치자 영실이 상냥한 목소리로 한마디한다.
"만규씨! 물이 따뜻해서 좋아. 물 한번 추기고 나면 피로가 풀릴 꺼야."
"OK!"
나는 영실이 시키는 대로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머리를 핥고 몸을 간지르며 흘러간다.
조금 전까지 취기에 익숙했던 몸이 생기를 찾은 것 같아 기분이 상쾌했다.
머리를 말리지 않고 밖으로 나오니 영실이 방안의 모든 불을 끈 채 침대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서로를 알만큼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신을 내어놓기가 창피했는지 불을 다 꺼버린 것이다.
나는 다시 욕실로 들어가서 젖은 머리와 몸을 수건으로 잘 말리고 나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영실의 몸은 뜨거웠다.
나의 손끝이 다을 때마다 영실의 몸이 꿈틀거렸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영실이 나를 기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영실의 몸은 야광처럼 빛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듯 나의 집착이 고개를 든다.
나는 영실의 몸을 나의 입술로 만지기 시작했다.
영실은 견디기가 힘든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으려 했다.
이번에는 아직도 물기에 젖어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질하였다.
그녀의 크지 않은 젖무덤을 두 손으로 곱게 덮었다.
손바닥에 작은 앵두가 만져졌다.
그녀의 호흡이 빨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영실이 나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톱이 내 등에 골을 판다.
이제 영실이 나를 받아들이려 한다.
나는 영실의 몸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
아-! 밤. 어둠이 소리를 지른다. 밤.
어둠 속으로 바람이 스쳐간다.
뜨거운 사막의 열풍이. 어둠 속으로 파도가 밀려온다.
물보라를 뿌리며 하얀 파도가 몰려든다. 밤.
그 어둠 속에서 두 몸이 하나가 된다. 사랑이 하나의 이름으로 만난다.

- 밤에 배우는 몸짓.
나를 받으소서.오감을 하나로 하여뜨거운 나의 호흡 온전히 받으소서.
밤으로 잇는 느꺼운 몸짓으로 내 하나 뿐인 사랑그대로 받으소서.
사랑으로 불타산화하는 몸짓나와 그대의 삶으로 받으소서.


셋.
호텔에서 몸을 굴린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그 사이 정규 대학을 졸업하여 입사한 고등학교 동창들도 하나 둘씩 늘어났다. 입사 년도를 따지면 뒤에 들어온 녀석들 보다 봉급이 훨씬 많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동생 녀석도 대학을 졸업하고 방위 산업체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3년 아래인 동생 녀석이 도리어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막내 여동생도 지방 대학에 들어가 대학 생활을 하고 있어서 우리 집안은 그야말로 태평성대였다. 아버지가 내년에 정년 퇴직을 하시더라도 여동생은 우리 형제가 알아서 돌보아 줄 수 있었다. 영실은 유학시험을 몇 번 보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서 졸업 후에는 본격적으로 유학 원에 등록하여 미국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사회를 바라보는 나의 안목도 많이 달라졌다. 학교 선배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호텔의 생활에서 그들을 통해 주어들은 정보도 꽤 많았다. 지난해 호화 유람선을 타고 미국으로 들어간 선배가 보내준 편지를 통해 그곳의 실태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던 강선배가 작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L.A에서 옷가게를 한다. 그 선배는 편지를 쓸 때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선은 건너오라고 한다. 미국에 와서 살다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법적 신분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일들이 현실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것이 꿈속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저임금의 고급 노동시장을 미국회사들이 군침을 삼키고 있다고 하니 그런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마침 우리 호텔과 계약관계에 있는 미국의 호화 유람선 회사에서 식당 웨이터를 구한다는 정보가 흘러 나왔다. 한번도 구경해 본적은 없지만 유람선이 서울 운동장만큼 크다고 하니 식당에서 일할 웨이터들 숫자도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천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싣고 몇 달 동안 세계 일주하는 배를 상상하기만 해도 가슴이 벅찰 정도였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기항지가 미국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시라고 한다. 동남아 일주를 하고 계약이 끝난 선원과 식당 종업원을 새로 뽑는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몸으로 떼우는 것이 내 신세라면 남의 시중을 들더라도 호화 유람선 한번 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지만 결혼한 선배들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몸으로 떼우는 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매니저만 잘 다루면 유람선 문제도 풀릴 것 같았다. 전문 학교 대선배인 매니저도 그렇게 어려운 점은 없었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백전 노장의 매니저는 나 같은 놈을 잘 이해해 주었다.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뛰는 나를 그 선배는 진작에 눈여겨보았을 지도 모른다. 틈만 나면 영어 공부를 하라고 충고해 주는 선배의 말속에는 나를 염려해주는 자상함이 있었다. 요즈음 대학 졸업생들에게 호텔 관련업이 인기 있는 직장이라 매니저 선배처럼 승진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일반 대학 졸업자와는 학벌로 뒤지는 현실이었지만 그렇다고 2류 인생으로 머물기에는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 가리라.'왠지 오기가 생기던 참이었다. 그러던 차에 호화 유람선 건은 나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해 주고 있었다. 평상시에 영어 공부를 해두라는 선배의 충고대로 회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쉬지 않고 뛰어다녔다. 영어를 배워서 말이라도 알아듣고 싶었다. AFKN을 보더라도 귀가 뚫리지 않아서 답답하기만 했는데 그 답답함을 풀어보고 싶었다. 나중에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영어를 배워두면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다. 돌머리는 아니었는지 등록한지 육 개월쯤 지났을 때부터 제법 씨부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된장의 귀로 치즈 발음을 완전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대로 귀가 트이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말은 아직도 멀었지만 듣는 귀로도 준비는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매니저를 찾아가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선배를 만나겠다고 작정을 한지 이틀이 지난 후 매니저를 찾아갔다.
"강만규. 무슨 일이지?"
"선배님! 다름 아니라 CRUISE 소문 건 때문에..."
"자네도 그 일로 찾아 왔구먼."
"벌써 결정된 일입니까?"
"소문이 돌던가?"
"오래 전부터요."
"걱정하지 말고 자네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게. 땀 흘리는 사람은 보석처럼 빛나 보이게 마련이니까."
"선배님 생각은 어떠신 지요?"
"좋은 기회지. 세상 구경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니 말일세."
"경쟁이 심하겠지요?"
"영어는 할 수 있어야겠지...."
"테스트도 합니까?"
"그 쪽에서 간단한 회화 정도는 물어보겠지."
"주도권이 그 쪽에 있는 겁니까?"
"고용하는 쪽이 거기니까 당연한 일 아니겠어?"
"추천은 우리 쪽에서 하겠지요?"
"물론이지."
"추천자는 내정 된 상탭니까?"
"성급하기는... 아직 결정된 사항은 없네. 앞으로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할껄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몸으로 떼우는 것이니..."
"한번 생각해 보겠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뭐 은혜랄 것까지는 없지. 아직 확정된 사항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야."
"그래도 선배님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비행기 태우지 말게나. 그러다가 추락하면 시체 찾기도 힘든 일이네."
"부탁 드립니다."
"알겠네. 한눈 팔지 말고 맡은 일이나 열심히 하게나."
"잘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방해한 건 없는지..."
"참 센스 있는 친구구먼. 제 용무를 다 마치고 실례했는지 물어본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O.K. 수고하게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놓아서 일단은 홀가분하였다. 그리고 뭔가 기대를 걸 수 있어서 살맛이 났고 기다리는 세월조차 의미가 있었다. 정신없이 바쁘게 몸을 굴리다 보니 두 달이 후딱 지나갔다. 동료 직원들은 몸을 사려가면서 하라고 했지만 몸뚱이 하나로 이 방면에서는 최고가 되고 싶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매니저 사무실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드디어 뭔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막상 매니저를 찾아가는 그 짧은 순간의 떨리는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도어를 세 번 두드렸다. 잠시 후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들어오라는 신호를 하였다.
"부르셨습니까?"
"강만규! 어서 들어오게나."
"무슨 일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려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정 단계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겠지. 그 쪽에서 15명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왔다네. 대우 조건이 기대한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받아 들일만 한 편이지. 30명을 추천해서 보냈으니까 기다리면 될껄세. 15명 안에는 들어갈 자신이 있겠지? "
"15명이나요? 도대체 얼마나 큰 유람선이기에 그렇게 많이 채용한답니까?"
"승객만 해도 2000명은 된다고 했으니까 자네가 상상해 보게."
"역시 양놈들은 스케일이 크긴 크군요. 그런데 배는 타게 되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자네 서류도 함께 보냈으니까 이변이 없는 한 나보다 먼저 유람선 구경을 하게 될 걸. 떠나기 전에 소주라도 함께 하세나."
"물론 이지요. 그런데 결과는 언제쯤 알게 되겠습니까? "
"보름 후에는 알 수 있겠지. 고용 계약 후 한달 내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더군. 양놈들한테 멸시 안 당하려면 영어 몇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어야겠지..."
"달리 준비할 사항은 없겠습니까?"
"그 동안 애인 단속이나 잘 해두게나. 계약 기간이 2년이니까 돌아 올 때 딴 남자랑 살고 있는 애인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 하-하-하."
"선배님도... 말씀이 끝나셨으면 이만..."
"그래 할 말은 다했으니까 마음의 준비나 단단히 해 두게나."
"잘 알겠습니다."
"나가 보게나."
"감사합니다. 선배님."
도어를 닫고 밖으로 나올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배에라도 오른 듯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해풍이 전신을 감쌓는 기분이었다. 영실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그녀의 입에서 미국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가슴을 움츠리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대답했었다. 불과 삼 년 후 영실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해 줄 기회가 온 것이다. 여태까지의 역경을 보상받을 수 있게 되어 가슴이 벅찼다. 한 편으로 삶의 전환기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가족과 영실의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겠다는 조바심도 일었다. 영실이를 알게 된지도 3년이 넘었지만 우리는 내연의 관계를 유지할 뿐 결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의논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을 성사시키려면 영실의 미국에 대한 꿈이 사라져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 문제의 화살이 나에게 향한 셈이다. 고용 계약이 확정되면 2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앞으로 보름은 기다려야 한다니 구체적인 계획은 영실이를 만나서 결정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일을 하다가 보면 주객이 전도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나를 부리는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내가 일을 주도할 경우에는 일에 능률도 오르고 시간도 빨리 간다. 그러나 내가 일에 끌려 다닐 때는 실수 연발의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고되고 심각하게 된다. 이틀 후로 다가온 서류 전형 발표가 나를 안절부절못하게 하는 것이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눈앞에 다가온 당락의 문제로 인해 매사에 짜증이 났고 작은 일에도 실수를 거듭했던 것이다. 나쁜 결과나 예상 밖의 사태가 벌어지면 그 동안 간직했던 꿈과 희망이 물거품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불안과 초조로 이틀을 보냈다. 조회 시간에 15명의 합격자인 듯한 사람들이 매니저 사무실로 불려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안에 나의 이름은 없었다. '아! 어둠의 세상이여.' 면담을 마치고 나오는 그들의 모습은 세상을 얻은 것 같은 표정이었고 앞으로 펼쳐질 선상 생활과 미국에 대한 이야기로 들떠 있었다. 이 절망감!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꺼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30명 중 15명 안에도 못 든 자신이 부끄럽기만 하였다. 앞으로 펼쳐질 2류 인생의 비참한 말로가 눈앞에 생생히 비쳐졌다. 이 상실감! 15명의 무리들이 사무실을 모두 빠져 나오자 매니저가 나를 따로 불렀다.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매니저를 찾아갔다. 나의 얼굴을 바라본 그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을 했다.
"우선 거기에 앉게. 자네를 따로 불러서 할 말이 있는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 보군. 몸이 안 좋은가?"
"아닙니다. 확정자 안에 들지 못해서 면목이 없습니다."
"너무 실망하지 말게나."
"이런 기회가 또 있겠습니까?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는데...."
"젊은 사람이 왜 그러나?! 패기는 어디다 두고 말이야!"
"기대가 워낙 크다보니 그만...""그만 어쨌다는 건가?""이렇게 되었으니 호텔에서 열심히 뛰어 보겠습니다."
"자네 같은 정신 상태로는 호텔에서도 힘들겠는데."
"선배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히...."
"명함판 사진 5장 준비해 와! 칼라로 모래까지. 새 직장 구해 볼 테니까."
"갑자기 새 직장은 무슨?"
"자네 배타고 싶지 않나?"
"이미 결정된 사항 아닙니까?"
"벌써 결정된 사항 맞지."
"그런데 어떻게?"
"그 쪽에서 자네를 잘 보았는지 수퍼 대우를 하겠다는 군. 열 다섯 명의 통솔 반장으로 뽑힌 셈이지."
"그런 소식을 왜 지금 말씀하십니까?"
"자네가 언제 기회를 주었나? 얼굴을 시무룩하게 하고 있어서 말 꺼내기도 힘들게 해놓고 이제 여유를 찾았나보군."
"저는 또..."
"또 뭔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부르지 않아서 그만..."
"크게 살게나. 아까 부른 15명은 월급이 800 불이고 자네는 1000불이라고 하는데 모두 모여 있을 때 그 말을 해 보게나. 자네 보는 눈길이 어땠을까? 모두들 자네가 대단하다고 존경이라도 했을까?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따돌림받게 되는 셈이지. 그래서 자네를 따로 부른 걸세."
"죄송합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그만..."
"자네의 심정도 알만하니 마음 굳게 먹고 한번 열심히 해 보게나. 그리고 이 서류에 서명이나 하게. 계약 기간 2년 동안 신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니까 미국에 도착해서 딴 생각 먹지 말고 돌아오라는 걸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서명한 사항이지만 나중에 채용될 사람들 조건 까다롭게 만들지 않도록 하게. 이런 말하는 이유는 자네가 특별히 신경을 써서 15명 가운데 한 사람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뜻이지. 젊을 때 세상 구경하면 별별 생각이 다 들거든. 떠나기 전에 모두 모아놓고 한번 더 주의를 시키겠지만 자네는 항상 염두에 둬야 할걸세. 떠나기 전에 스카이 라운지에서 멋진 송별 파티를 차려주겠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나는 엉겁결에 바닥에 머리를 대고 큰절을 하려고 했다.
"강만규 왜 이러나?"
"제 정신이 아니라서..."
"그래? 하-하-하."
조금 전까지도 절망감에 쌓여 눈앞이 깜깜하던 현실이 한 순간에 광명천지로 변하고 있었다. 정말로 극적인 변화였다. 불과 몇 시간 남짓한 사이에 절망과 환희의 달고 쓴맛을 함께 맛본 것이다. 월급이 1000불이면 우리 돈으로 80만원이나 되는 큰돈이다. 지금 받고있는 월급의 두 배가 넘는 파격적인 대우였다. 2년만 고생하면 2000만원은 모을 수 있고 그 정도의 목돈으로 웬만한 장사도 가능할 것 같았다. 부화도 안된 달걀로 닭을 헤아리는 격이었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지금 같아서는 더 이상의 성공도 필요 없을 것만 같았다. 영실을 보고 싶었다. 목돈을 움켜쥔 2년 후에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결혼하면 영실의 미국에 대한 꿈도 현실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저녁에 영실이를 만나기로 했다. 영실이와 처음 만났던 다방으로 약속을 정하였다.
학원을 마치고 오는지 영실이 약속 시간보다 늦어진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늦었던 기억이 난다. 군에서 제대하고 영실이를 소개받을 때 그녀를 30분 정도 기다렸던 것 같다. 3년 전의 그 여름과 금년 여름의 계절적 차이는 없지만 내 자신의 변화는 여름과 겨울이 다른 것처럼 완전히 탈바꿈을 한 격이었다. 영실이를 만나던 그 날을 돌이켜 보면 자신 없고 위축된 젊은이의 모습밖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이 살던 내가 영실이의 칼날 같은 질문을 받고 얼마나 당황하였던가.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영실이가 나를 믿고 의지하는 내면에는 나의 변화를 목격하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이라는 갈 수 없던 먼 나라가 한달 뒤에는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천국이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꿈으로만 생각했던 사물의 실체를 생생하게 만져볼 수 있게되었으니 그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난날에는 상상도 하기 싫었던 삶의 현실이 지금은 축복으로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영실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귓속말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나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는 영실의 사랑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영실의 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느 틈에 왔는지 그녀가 내 앞으로 와서 앉는다.
"만규씨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니. 별로."
"무슨 일이야? 평일에 불러내고."
"옛날 생각나서 불렀어."
"새삼스럽게 추억 살리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까 영실이가 보고 싶어지다군."
"무슨 일 있는 거야?"
"아니....."
"그런데 왜 분위기 잡고 있는 거야. 만규씨 답지 않게 말이야."
"영실이를 만난지도 3년이 넘었어. 기억나? 처음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했는지?"
"내 이름을 주었겠지."
"그런 거 말고."
그 때 종업원이 다가오자 영실이 커피 두 잔을 시킨다.
"그러면 뭐야?"
"나한테 무슨 계획이 있냐고 물었지?"
"어디 가?"
"당장은 아니야."
"그러면 언제?"
"한 달쯤 후에."
"어디?"
"한 번 맞춰 봐!"
"지방에?"
"아니!"
"그러면?"
"맞춰 보라니까."
"자신 없어. 갈만한 곳이 한두 군덴가 뭐?"
"그래? 그나저나 유학준비는 잘 되어가?"
"문법은 그만한데 hearing이 영 안돼."
"학원 다니면서 나아지지 않았어?"
"잘 모르겠어. 다음 달에 시험이 있으니까 한번 더 부딪쳐 봐야지..."
"몇 번째야?"
"세 번."
"삼세번이라니까 좋은 성적이 나올 꺼야."
"그럴까?"
"천하의 한영실이 다 죽었구나. 왜 이렇게 자신이 없는 거야!"
"하룻강아지였나 봐."
"격려의 만찬이라도 차려줘야겠는데! 오늘은 내가 한턱 내지."
"좋은 일 있어?"
"이따가 가르쳐 줄께."
"궁금하게 굴 꺼야?"
"차나 빨리 마셔. 저녁 먹으면서 개봉해도 늦지 않겠지?"
"좋아."
영실은 찻잔을 반이나 남긴 채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간다. 나의 비밀이 궁금하기도 했겠지만 답답한 실내 공기가 가슴을 꽉 막히게 해서 될 수 있으면 다방을 빨리 빠져 나오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무교동 낙지 골목으로 갈까?"
"만규씨 맘대로."
"영실이 기억해?"
"뭘?"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영실이가 낙지 볶음으로 이 배고픈 젊음을 달래준 사실."
"만규씨 왜 그래? 오늘 따라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아."
다방을 빠져나와 무교동으로 걸어갔다. 영실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상점 앞을 지나면서 윈도우에 반사되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난다. 볼품없고 축 늘어진 어깨의 젊음. 일부러 그때 일을 떠올리며 상점 앞에 서 보았다. 그 동안의 세월을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특별한 변화를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때의 그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닐까. 물상의 변화는 없건만 사고의 추이가 빨라졌는지도 모른다. 넋나간 사람처럼 서 있으니까 영실이가 나를 깨운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아니! 그냥 구경하고 있었어."
"어디 간다면서 필요하지 않아? 내가 한 벌 사줄께."
"아니야. 됐어."
"정말? 후회하면 늦으리."
"내가 어디 멋부리는 것 봤어?"
"하긴 그래."
영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말에 수긍을 했다. 걷던 길을 재촉하여 가다보니 어느새 낙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냄새가 군침을 삼키게 할 정도로 식욕을 당기고 있었다. 우리는 초입에 있는 낙지 전문집으로 들어갔다. 저녁 하기에는 이른 시간인지 사람들이 별로 붐비지 않았다. 낙지볶음과 소주를 한 병 시켰다. 자리에 앉아서 소주 한잔을 들이키고 나니 마음이 착잡하였다. 가슴에 숨기고 있던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까 고민하다가 소주의 힘을 빌어 한마디한다.
"나 미국 가."
결국 준비하고 꺼낸 말이 굉장한 폭탄 선언이 되고 말았다. 영실은 나의 말을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보다 먼저 꿈의 나라로 가게 된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 만에야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다급한 어조로 질문을 던진다.
"언제 가는 거야?"
"한 달쯤 후에."
"그렇게 빨리?"
"자신 있겠어?"
"뭐가?"
"기다릴 자신!"
"얼마나 나가있는 건데?"
"2년."
"그렇게 오래?"
"배를 타게됐어. 2년 계약으로."
"외양선?"
"초호화 유람선이라는데 상상이 가질 않아."
"축하할 일이네."
"축하?"
"기쁘지 않아?"
"영실이가 걱정되는데 기쁘긴 뭐가 기뻐."
나는 영실이를 바라보면서 소주병을 입에 부어넣으려 했다. 그러자 영실이가 놀란 듯 급하게 말렸다.
"병 채 마실려구?"
"갈증이 나서"
"이리네. 내가 따라 줄께."
"......"
영실은 나의 술잔을 채우고 나서 자기 앞에 있는 것도 채웠다.
"왜 지금 와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확실하지 않았어. 오늘 결정된 사항이거든."
"걱정돼? 영실이가?"
"물론이지."
"버리지 않으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빈말이라도 그런 식으로 뱉어 내지 말아!"
"사랑해?"
"언제나 일편 단심으로! 솔직히 말해서 영실이랑 결혼하기로 결정하면 미국으로 떠나는 것도 포기할 수 있어."
"그러면 됐어. 우리 축배 하자
무슨 축배?"
"만규씨의 일편 단심과 미국에서의 재회를 위해."
"......"
"사실은 입학 허가서를 받았어. 그쪽에서 어학에 신경만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그랬어. 다음 달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쪽 학교에서 어학 훈련을 받을 생각이었거든."
"괜히 손해본 기분인데."
"그걸 가지고 손해를 봤다고 그러면 쓰나!"
"언제쯤 떠날 것 같아?"
"금년에는 너무 늦었지만 내년 봄에는 확실할 꺼야."
"어디로 갈껀데?"
"뉴욕. 선배 언니도 있고 먼 친척도 그 곳에서 장사를 한다니까..."
"쿠루즈 기항지도 플로리다라고 하는데 거리가 먼 거 아니야?"
"국내선 비행기로 몇 시간이라는데 뭘 그래? 딴 나라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좌우지간 잘 된 일이야. 자- 축배!"
"축배."
영실이를 처음 만나던 날 무심코 뱉었던 많은 말들이 운명처럼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영실이는 내게 있어서 축복의 여신이었다. 천주님 옆에서 세상의 운명을 주관하는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신한 여신. 한영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갔다. 여권과 비자를 받아들고 모처럼 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년 퇴직 이후 아버지의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일손을 놓는 순간 죽음은 한 발치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인가? 외부에서의 자극이 없는 때문인지 요 몇 달 사이 아버지가 갑자기 늙어 보이시기까지 했다. 반면에 어머니는 막내 동생과 아버지를 보살피시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계셨다. 결국 고생은 어머니가 더 하시게 된 셈이다. 그래도 아버지의 곁에서 장남 역할을 하는 동생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향집에서 몇 일을 보낸 다음 동생에게 내가 없어도 부모님을 잘 보살펴달라는 뒷일을 당부를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매니저 선배가 베풀어준 환송 파티는 이름 그대로 뻑적지근한 것이었다. 나와 15명의 계약자들은 술독에 빠지면서도 흥겹게 떠들어댔다. 마치 승전가를 부르며 전장으로 떠나는 신병들과 다름이 없었다. 큰 기대와 부푼 꿈으로 사기 충천하여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퍼마시고 퍼마셔도 취할 것 같지 않았다. 술독에 익사한다 할지라도 기쁨의 머리만은 술 위에 떠오르고 있었다.
떠나기 전 날 나는 영실에게 실 반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나 다짐은 없었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일편 단심의 속마음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사이에 세상의 예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음의 정표라도 있으면 기다림의 세월이 수월하게 지날 것은 분명하였다. 새벽이 될 때까지 영실을 끌어안고 그녀와 느꺼운 호흡을 나누었다. 나의 운명적 여인. 축복과 행운의 여신 한영실. 운명으로 맺어진 우리의 만남은 세상의 끝이라 해도 우리를 갈라놓지는 못할 것이다. 마침내 고향 산천과 그리운 얼굴들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야 할 순간이 되었다. 떠나기 전까지 눈물만은 보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헛수고였다. 주책없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참으려 하면 할수록 격한 감정이 눈물샘에 돌을 던지며 심한 물결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세상의 일들이 처음의 계획대로 되어가는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청춘의 한 장을 마감하며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였다. 스물 여섯의 젊음이 어떤 얼굴로 변해갈 것인가는 아무도 모르는 수수께끼였다. 세월의 그림 속에서 청춘의 순간이 한 곳에 머물지 않듯 운명의 표정도 변할 것이 분명하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할 젊음의 시간에게 이별의 말을 던진다. 그리운 사람들이여 잘 있으시오. 흙 냄새 풍기는 고향 산천이여 안녕.- Good-Bye.




넷.
New York.꿈에 그리던 미국이 세상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 그것은 분명 천국이 아님을 단 몇 달의 체류를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기본 생활비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들었고 인종 차별의 벽이 높게 쳐진 거대한 모순 덩어리. 영실의 꿈으로 과포장된 천국은 하루가 다르게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영실과 나는 서울에서 약속했던 하나의 의식을 신천지에서 펼칠 수 있었다. 운명의 끈으로 연을 맺은 우리의 관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서로의 주인공이 되기로 하였다. 영실은 먼 친척이 운영하는 잡화 가게에 나가서 일을 거들었고 나는 고향 선배가 경영하는 세탁소에 나가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돈도 없지만 그렇다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도 못하는 처지였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세탁소도 감사하며 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이 짓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까마득했다. 프레스를 누르려고 이 천국으로 탈출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나 현실은 다른 생각을 용납하지 않았고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현지 생활을 통해 우리는 서울에서 전혀 예상하지 않던 일들이 현실에 널리 깔려있는 것을 하나 둘씩 깨닫게 되었다. 미국은 분명 천국이 아니었다. 남의 속곳까지 빨아야 하는 처지에서 어느 누가 천국을 운운할 수 있겠는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이곳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나약한 의지를 한껏 뒤흔들어 놓곤 한다.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그들과 섞이지 못하는 완전한 고립이 영실과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려서 번 돈도 겨우 집세와 생활비를 지불하고 나면 그만 이었다. 그래도 영실은 유학의 환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내일에 대한 꿈을 키우고 있었다. 빌어먹을 공부가 그녀를 끌고 가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인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렵게 끌어 올렸던 자존심과 가능성이 하루아침에 바람 나간 풍선처럼 되어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잃어버린 그것들을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곁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그것도 고급 양주들이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 술들은 나에게 괴로움을 강요하지 않았고 어려운 영어로 불만을 토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멍든 가슴을 부드럽게 달래주거나 피곤에 지친 육신을 평화롭게 받아주곤 했다. 영실은 천주님을 찾아다니며 상실한 꿈을 다시 찾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대한 음모를 위해 그 서곡은 너무나 감미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얼마나 원대한 야망을 간직하고 있었던가? 호화 유람선으로 동남아를 일주하면서도 미국에서 펼쳐질 복된 나날을 꿈꾸며 갖은 고생을 이겨내었다. 선 내의 생활은 비록 노예와 다름이 없더라도 신대륙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놈은 그렇게 미련 덩어리가 아니었다. 동양인에 대한 서양 놈들의 보이지 않는 우월감과 승무원들로부터 받아야 했던 숱한 모멸감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제깟 놈들이 영어를 하는 게 기껏해야 자기 말을 지껄이는 것이지 어려운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별 수선을 다 부리는 걸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니 속으로 곪는 쪽은 우리들이었다. 이름은 그럴 듯해도 지난 2년 동안의 호화 유람선 생활은 우리에게는 선상 노예 생활과 다름이 없었다. 기억에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노예 생활.
주위 분들의 덕으로 더부살이 인생을 버티어 온 지도 벌써 1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고향 선배가 타주로 이사를 가게되어 우리의 살길을 스스로 찾아야 할 형편이 되었다. 우리 수입원의 반이 졸지에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미국에 와서 배운 것이라고는 세탁소에서 프레스를 누르는 일 뿐이었고 그 가락대로 사업을 하려해도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영실의 몸에도 변화가 생겨서 잡화가게에서 일을 하는 것도 무작정일 수는 없었다. 영실이 마저 일 손을 놓는다면 우리는 당장에 산 입에 거미줄을 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불행과 난국은 틈만 나면 고개를 내밀고 우리의 생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한 달에 1000불을 겨우 넘는 수입으로 두사람의 입에 풀칠을 하는 일도 쉽지가 않았지만 앞으로 태어날 녀석의 장래는 생각도 못할 형편이었다. 이대로 앉아서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결단이라도 내려야만 했다. 따지고 보면 별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몸으로 이력이 난 인생 다시 몸을 굴리는 수밖에 없었다. 좌절이나 패배감으로 지금의 난국을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영실의 뱃속에 있는 녀석에게 웃음을 심어주고 싶었다. 세상을 나오기 전부터 비극의 현실을 건네주고 싶지는 않았다.
유람선에서 일했던 경력이 다행스럽게도 일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과 쿠루즈의 웨이터 경력으로 한국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일단은 안심을 해도 좋았다. 기아의 선상에서 구조를 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구름은 사라진 셈이다. 천주님의 뜻인지도 모른다. 영실의 神이 우리의 처지에 감동하여 동아줄을 내려준 것은 아닐까?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하는가 보다. 이 바닥에서는 누구 보다 이력이 난 내가 아닌가? 하여튼 눈앞의 시름은 덜어놓은 셈이다. 단 하루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전과는 다른 참다운 삶을 발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 같았다.
Manhattan.세상 사람들 누구나 동경하는 이 밤의 거리에서 나의 웨이터 생활 2기가 재현되었다. 성경에도 신의 명령으로 아담에게 내린 노동. 이처럼 노동은 어느 정도의 신성함을 내포하고 있다. 머리를 굴리며 남을 등쳐먹는 부류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도 알고 보면 엄청난 노동의 산물일 수 있다. 남의 주머니에서 생돈을 끌어내려고 잔머리를 굴려보지 않으면 그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육체 노동에는 밟아 올라가야 할 단계가 있다. 비약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에 깨어나니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식의 전설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일하는 곳은 한인 상가들이 밀집한 한인타운의 식당이다. 밤이면 휴식과 추억의 현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 장소적으로 뉴욕이라고 말하지만 이곳은 서울의 밤과 다를 바 없었다. 하루의 피로를 대화나 술로 해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단지 같은 종류의 얼굴을 확인하기위해 몰려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말로 한국 이야기를 하는 한국 사람들. 이들은 미국의 한 복판에서 이런 식으로 고향의 그리움을 대신했고 사랑하는 사람의 그리움을 달래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고 일을 하다보니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한 때는 우리가 천국에서 추방당한 저주의 인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도 옛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세탁소에서 프레스를 누르는 것보다 수입이 좋아서 형편도 나아졌다. 기본급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팁으로 배당된 돈이 짭짤해서 둘이 뛸 때보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게된 것이다. 동료들과도 관계가 좋은 편이어서 유람선 시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일이 쉬었다. 한솥밥을 나누어 먹는 처자라서 그런지 서로를 이해하고 힘든 일을 나누는 그들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이것이 노동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끈인지도 모른다. 미국은 참으로 묘한 곳이다. 서울에서 사귄 직장 동료를 가운데 나보다 학벌이 좋은 친구들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은 사정이 그렇지 않았다. 유학의 원대한 꿈을 간직하고 이 땅에 와서 남의 밥시중을 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권이라는 친구가 그랬다. 서울의 일류대학을 나와서도 결국 나와 다를 바 없게 된 것을 보면 그 일이 먼 나라의 일은 아니었다. 권이라는 친구만 별난 것이 아니었다. 이곳 생활의 연조가 깊어지다 보니 그런 사람들이 눈에 자주 들어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등골이 빠지도록 하루를 죽이는 정이라는 친구도 바로 그런 부류였다. 그는 지방의 국립대학을 나와서 교수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미국에 건너온 촌놈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미국은 천국이 아니었고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폐쇄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Broad way의 한 야채가게에서 일하는 그가 우리의 좋은 술친구가 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서로 연배도 같았고 같은 처지의 인생들이었기 때문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고립의 유배지에서 권과 정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恨을 달래기에 충분한 말동무가 되었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보면 생각지 않은 일들이 생기곤 한다. ㅅ물산 지사원들의 회식이 있던 날의 일이다. 저녁때라 사람들로 붐볐고 회식으로 분위기가 들떠있던 그날에 권과 내가 20명이 넘는 그들을 서브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목소리로 아우성을 치는 그들을 우리 둘이 담당하는 것은 사실 역부족 이었다. 더군다나 그들 가운에 몇몇은 이미 술에 취해서 우리에게 거친 말을 던지고 있었다. 바쁘게 음식을 나르고 있던 권이 헛발을 짚어 기우뚱한 순간이었다. 테이블 끝에 앉아있던 친구가 권을 향해서 뭐라고 지껄였다.
"어이! 조심하지 않고 웬 수작이야. 그분은 특별히 신경을 써서 모셔야 하니까 실수하지마 임마!"
이 실수로 음식을 엎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균형을 잃어 기우뚱한 것뿐이었는데 웬 놈이 높은 상사 앞에서 유세를 떨려고 그런 것 같다.
"바닥이 미끄러워서 그만.... 조심해서 모시겠습니다."
"이 바닥에서 몸을 굴린 지 얼마 안 되는 신참인가 보군."
"앞으로는 특별히 조심하겠습니다."
권이 저지르지도 않은 실수를 인정하듯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 친구가 약점이라도 잡은 듯 입에 거품을 물며 호령을 한다.
"야! 너는 뭐 하는 놈이야. 술 가져오라고 그런지가 언젠데 구경만 하고 있어?"
그가 나를 향해 거친 말로 지껄인다. 그의 언사가 지나쳤는지 누군가 그를 말렸다.
"김대리! 말조심하게. 다 같은 한국 사람끼리 왜 이러나!"
"이사님. 그런 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다루어야 대접을 받습니다. 본성이 게을러서 큰 소리로 하지 않으면 영 말을 듣지 않거든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게! 더군다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왜 그러나?"
"알겠습니다."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내 탓이라도 된 듯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 더한다.
"뭘 봐! 빨리 가져오지 않고!"
배알이 꼴려서 쟁반을 엎어버리려 하다가 그 이사의 체면을 봐서 꾹 참고 주방으로 내려왔다. 자기 때문에 봉변을 당할 뻔했던 나에게 권이 말을 걸었다.
"강형! 한 번만 참아. 잘만 하면 오늘 팁은 두둑할 것 같거든."
"......"
속마음으로는 녀석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싶었지만 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회식이 있을 때마다 팁으로 받는 수입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쥐약이라 생각하고 성질을 죽여야했다. 지사쯤 되면 판공비도 많이 나오는지 먹고 마시는 일에 정신이 팔려 우리를 연방 불러대고 있었다. 회식이 있으면 술이 따르고 술이 들어가면 노래판이 벌어지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 조금 전 우리에게 거친 말로 유세를 떨던 그 친구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판을 유도하고 있었다. 살 판이 나는지 생기가 돋아 보였다. 얼마동안 노래 소리로 장내가 시끌벅적 하더니 회식의 끝을 장식하기 위해 이사라는 사람이 일어나서 회중을 향해 한마디한다.
"본사의 지침에만 움직이는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 지역 특성에 맞는 창의적 경영 자세로 한국을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인의식이 우선...."
짧은 격려사를 마치고 회중 모두가 단결을 외치며 축배를 들었다. 축배를 마치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뜨자 김대리라는 놈이 우리에게 다가와 무슨 말인가 지저대고 있었다.
"너희들 오늘 재수 좋은 줄 알아! 워낙 점잖으신 분 앞이라서 오늘은 조용히 보냈지만 다음에 그런 실수를 하면 가만 안 놔둘 줄 알라구!"
우리는 어처구니 없어하며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이사라는 분이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김대리를 끌고간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았다.
"젊은이들 오늘 수고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와도 잘 돌보아 주시구려."
부드러운 이사만 없었어도 김대리는 바닥에 곤두박질 쳐졌을 지도 모른다. 회식을 시중 들었던 우리에게 각각 50불의 팁이 할당되었다. 김대리 놈에게 수모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수지 좋은 하루였다. 식당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나로서는 회식에서 만난 무뢰한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권은 아가의 일은 벌써 잊어버렸는지 별다른 기색 없이 보통의 그로 되돌아 왔다. 역시 배운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다른 것 같았다. 권과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정이 일을 마치고 예의 방문을 하였다. 우리는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을 나누기 시작했다. 언제나 처럼정이 먼저 말문을 연다.
"자네들 오늘도 별 일없이 잘 보냈겠지?"
"나는 오늘 병신 같은 놈 만나서 사고 칠 뻔했어. 권형만 없었으면....."
"무슨 일인데?"
"별 일 아니야. 매일 벌어지는 일인데 뭐! 강형의 성격이 다혈질이라서....."
"다혈질?"
"그건 권형의 말이 옳은 것 같군. 강형 안 그래?"
"이건 다혈질이라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구!"
"성질이 먼저는 아니잖아. 어렵게 구한 일자리니까 기분내키는대로 살수는 없지."
권이 타이르듯 한마디한다.
"정형은 오늘 별 일 없었어?"
"하마터면 자네들도 못보고 구천을 헤맬 뻔했지."
그는 담담한 어조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인데?"
권이 궁금한지 정의 이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는 담배 한 대를 꺼내어 물었다.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담배를 다 태우고 나자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았는지 말문을 열기 시작한다.
"오래된 일도 아니야. 바로 한 시간 전의 일이거든. 10시 쯤되니까 손님들도 별로 없어서 한가히 잡일을 하고 있을 때였어. 흑인 두 명이 가게로 들어왔지."
"그래서?"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에게 되물었다.
"한 놈이 입구에서 꽃을 만지던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지. 그놈은 미리 준비했던 권총을 꺼내어 내 머리에 들이밀었어. 그러자 다른 한 놈은 케시어에게 달려가서 돈을 요구하고 있었어. 케시어가 겁에 질려서 당황하고 있을 때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있는 놈이 돈을 빨리 주지 않으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지. 나는 온 몸이 떨리고 앞이 깜깜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아, 이제는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더군. 이런 상황이 되니까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야. 매니저라는 사람도 말로만 들었던 권총 강도를 목격하니까 허수아비밖에 안되는거야. 이렇게 하다가는 영락없이 죽을 것 같아서 내가 말했지. 금고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서 놈들에게 건네고 다른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리라고 말이야. 혹시나 얼굴이라도 알게되면 보복을 할지 모르니까 그 놈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어. 다리가 떨리고 등골이 오싹 했지만 달리 뾰족한 수도 없어서 그렇게 말했지. 그 다음은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이 안나. 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다른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렸고 케시어는 돈을 꺼내어 두 놈에게 줬어. 돈을 받아든 놈들은 모든 용무를 마치고 유유히 사라졌어. 기가 막힌 일은 내게 총을 들이대었던 놈이 사라지기 전에 'Thanks!'하며 허연 이빨을 보이고 웃으면서 나가는 거야. 자기들 일에 협조를 해준 것이 고맙다 이거야.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떨려."
"자, 냉수라도 마셔. 정신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야."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권이 정에게 냉수를 권하며 안쓰러워 했다.
"고마워. 아직까지 아찔해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죽일 놈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내가 아까 있었던 김대리의 일을 생각하며 분풀이로 뱉어냈다.
"가게는 제대로 수습이 되었고?"
권이 다시 물었다.
"조금 전까지 경찰들이 몰려들어 질문을 하고 갔어. 강도치고는 대담한 놈들이래. 밤 10시에 맨하탄 한 복판에서 있는 여유 없는 여유 다 부리면서 일을 저지르고 갔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사건 처리는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하더군...."
"십년 감수를 했으니까 술이라도 한잔하지 그래?"
이번에는 내가 맥주를 권하면서 강의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이거- 겁나서 일 하겠어? 사람 사는 것이 파리 목숨과 다를 바가 없으니..."
권이 누구에게라 할 것 없이 한마디 뱉었다.
"지옥 같은 세상."
나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지옥 같은 세상. 그날 우리는 술독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정도로 술을 마셨다. 술이 없으면 미쳤을 지도 모르는 현실이 우리의 주위에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영실의 배는 산처럼 불러갔다. 지옥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그녀에게는 천주님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에 이 현실을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종교라도 있어서 현실의 어려움을 의연히 버틸 수 있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그녀에게는 천국이 그녀의 삶의 가치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지금의 삶이 현실적으로 고되고 험난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견딜 수 있는 시련이며 천주님이 주시는 시험에 지나지 않 다는 것이 그녀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어쩌면 영실이는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천국 시민의 자격으로 육의 껍질을 빌려쓰고 세상 나들이를 하는 것은 아닐까?
생존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삶에도 연말의 들뜬 기분은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시간이 주는 여유를 한번쯤은 되돌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이 되면 동창 모임이다 망년회다 하여 식당은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마련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도 풍요를 제공하는 계절이 바로 연말이고 원치 않는 사고가 많이 터지는 계절도 이 연말이다. 지난번에 ㅅ물산 지사모임으로 낯이 익었던 사람들이 다시 찾아왔다. 반갑지 않은 김대리의 얼굴도 그 중에서 찾을 수 있었다. 지난 번 일로 해서 그들과 멀리 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권과 내가 그들을 서브하게 되었다. 권이 나의 다혈질적 성격을 유의하라고 충고를 하며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막아보려 하였다.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그 가운데 반드시 별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아마 김대리라는 사람이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가 우리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해왔다.
"어이! 오랜만이야. 아직까지 한 곳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실수 없겠지? 지난번 같이 어설프게 굴지 말고 각별히 조심하라구!"
자리에 앉기도 전에 그는 우리에게 일장 훈시를 하는 것이었다. 그놈에게 이번만은 반드시 골탕을 먹이고 싶었다. 별실로 예약을 한 그들은 연말의 들뜬 기분과 보너스라도 받은 것이 흐뭇한지 하나 둘씩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지난 번 우리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이사라는 분은 눈에 띠지 않았다. 왠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대리라는 작자가 설치고 다니면서 분위기를 잡고 있었다. 그가 나를 가리키며 반말로 지껄였다.
"어이 너! 잠깐 이리 와봐!"
"부르셨습니까?"
"우선 맥주 20명하고 양주 5병 먼저 가지고 와! 그리고 나서 식사 주문을 받으라고."
"안주는?"
"맵지 않을 걸로 알아서 가지고 오면 되잖아!"
"메뉴를 보시고 직접 고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 메뉴가 있으니..."
"이것. 이것. 그리고 이것. 저것으로 가져와."
"이건 겨울이 철이 아니라서 곤란한데 다른 걸로 시키시지 않겠습니까?"
"임마! 미국에 철이 어디 있어? 건방지게 뭘 안다고 말대꾸야!"
"손님. 그래도...."
"자식이 그래도! 지배인 불러와 임마. 웨이터 주제에....."
전에 동행했던 이사가 없어서 그런지 막무가내였다. 반말에 욕을 섞어가면서 한마디로 눈꼴사나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옆에서 말없이 주문을 받고 있던 권이 김대린가 뭔가 하는 놈을 쳐다보았다.
"뭘 봐! 그래, 기분 나쁘다 이거야?"
더 이상 이놈과 대꾸하는 것이 싫은지 권이 재빠르게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권이 녹녹하다고 판단되었는지 김대리라는 아랫사람을 다루듯 떠들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이래서 탈이라니까. 조금만 태워주면 머리 꼭대기까지 기어오르려 한단 말이야. 그놈의 노예 근성은 어쩔 수 없나 보지? 임마, 빨리 가져오란 말이야!" 견디다 못한 권이 주방으로 내려갔고 나는 회중의 식사 주문을 받으려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나를 발견한 그가 이번에는 화살을 나에게 돌려 한 마디 더한다. "지난번에 최이사님만 안 계셨더라면 이 녀석들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는 건데..."
그의 어투가 다른 사람들 듣기에도 민망하였는지 누군가 그를 제지하고 나섰다.
"김대리! 너무 그러지 말게. 다 같은 한국 사람들끼리 왜 그러나? 서로 도와줘도 힘든 미국 생활에서 너무 아랫사람 다루듯 그러지 말게. 사람 팔자 모르는 일이야."
"선배님 그게 아닙니다. 소리 질러야 할 땐 소리를 질러야 일이 빨리 되는 겁니다. 제 선에서 일을 처리할 테니 저에게 맡기십시오."
"자네가 처리한다니 말리지는 않겠지만 회사 모임이니까 너무 설치지는 말게나."
"......"
그는 선배가 나무라는 것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쓰며 내게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임마! 술 안 가져오고 거기서 뭘 해!"
김대리의 노리개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권이 술을 들고 왔다. 나는 식사 주문을 다 마치고 권과 함께 주방으로 내려왔다. 권은 나의 다혈질적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좋은 말로 달래려 했다.
"만규 마음에 두지 말고 한 귀로 흘려 버려. 세상에는 별 놈도 다 있으니까 미친 개한테 물렸다고 생각해 버리면 그만 아니야? 일 마치고 술 마시면서 풀어 버리자구."
"......"
대꾸도 없이 있는 내가 미심쩍은지 그가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말하였다.
"다혈질 그거 터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구."
"......"
반찬과 안주를 들고 별실로 갔다. 바쁘게 움직이면 화도 삭힐 것으로 생각했지만 김대리라는 놈의 얼굴을 보니 울화가 다시 일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만은 김대리 놈의 버릇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독종으로 불렸던 나는 웬만한 녀석과 맞붙어도 쉽게 물러나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잘 썼고 끈기도 있는 편이었다. 권투를 배우면서 망나니 버릇은 없어졌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끝장을 보지 않으면 성질이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나였다. 회식의 흥이 어느 정도 익어가고 있었다. 김대리라는 놈은 아까 선배에게 싫은 소리를 들은 것이 기분이 상하였는지 사회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술만 비우고 있었다. 나는 그의 동정을 살핀 후 그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선생님. 전화 왔는데요."
"누구지?"
지사 사람들도 그에게는 관심이 쏠리지 않는 듯했다.
"아래층에 가서 받으시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알았어."
그는 순순히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김대리 놈을 유인해서 화장실 옆으로 데려왔다. 전화는 무슨 전화? 처음부터 그 놈을 유인하기 위한 나의 전략이었다. 식당은 워낙 바쁘게 돌아가고 있어서 누구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거칠게 말을 뱉었다.
"야! 전화가 어디에 있는 거야?"
"형씨 나 좀 봅시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 이 놈이 실성을 했나? 형씨라니?"
미끼에 걸려든 놈이 처지를 모르고 입만 살아서 반항을 하고 있었다. 나는 화장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 챈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문을 열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형씨! 나 알아? 오늘은 처음부터 아예 반말로 지껄이더군."
"지껄여? 이 새끼가!"
"어쭈!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들리네. 아무래도 손 좀 봐줘야 하겠는 걸."
"손을 봐줘? 이 새끼가 환장을 했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대리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지나갔다. 나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 실력으로 어딜?"
애써 날린 주먹이 헛방으로 끝난 것이 약이 올랐는지 이번에는 뺨을 갈기려고 왼손을 길게 뻗었다. 나는 그의 팔을 공중에서 낚아채고 뒤로 비틀어 꺾었다. 생각 같아서는 팔을 꺾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이성적으로 이놈을 달래야 할 것 같아 그대로 잡고만 있었다. 뒤틀린 팔이 견디기 힘든지 놈은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허우적거린다. 나는 뒤로 꺾은 그의 팔을 풀어 주면서 주먹으로 아랫배를 찔렀다.
"윽-"
놈은 비명에 가까운 단발음을 날리며 괴로운 표정으로 아랫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독기 품은 목소리로 덤벼들려고 했다.
"너 오늘 밥줄 끊긴 줄 알아!"
겨우 몸을 세우며 입을 벌린 놈에게 아까보다 조금 무게를 더해서 한 방 더 갈겼다.
"으윽-"
놈은 힘으로는 더 이상 상대가 안 되는 것을 피부로 느꼈는지 한 풀 꺾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씨 우리 말로 합시다. 말로..."
"형씨? 그 주둥아리 함부로 나불대면 완전히 골로 보내겠어! 밥벌이가 이것밖에 없다면 모르지만 너같은 놈만 보면 작년에 먹은 밥알이 곤두서서 가만히 있지 못하겠거든. 좋게 말하겠는데 천수를 누리고 싶으면 죽치고 술이나 마시고 가는 게 어때? 내 말이 고까우면 미국에서 횡사의 현장을 목격할 수도 있지. 선택은 어디까지나 당신이 알아서 하겠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 그만 괴롭히는 게 어때?"
"잘 알겠습니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모두들 보는 앞에서 개망신 당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겠지?"
나는 권투로 단련된 주먹을 들어 그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가 기겁을 해서 나의 팔을 잡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제발 이번만은..."
나는 한참 동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김대리는 고개를 숙여서 나와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나와 뜻이 통하였는지 다른 말이 없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기세 등등하던 김대리가 예의 바른 김대리로 변하고 만 것이다. 그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나에게 인사를 하고 별실로 사라졌다. 때마침 권이 이 장면을 목격하고 이상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었어."
나는 더 이상 대꾸도 없이 별실로 걸어갔다. 권은 아직까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는지 내 뒤를 쫓아오며 다시 묻는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
회식은 조용히 끝이 났다. 사람들이 자리를 뜰 때 김대리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면서 머리를 숙인다.
"저녁 잘 먹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권과 내가 맞받아 답을 하였다. 뒤처리를 다 하고 나니 배당된 팁은 거의 100불이 되었다. 이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다면 이 일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우리의 휴식시간에 정이 밤일을 마치고 식당으로 왔다. 우리는 남들이 남기고 간 양주를 앞에 두고 술자리를 벌리며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있었다. 권은 김대리의 변화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도 되는 듯 다시 물어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김대리라는 친구 태도가 완전히 변해서 나가던데?"
"그 친구 또 왔어?"
지난 번 일을 기억하고 있던 정이 권을 도와서 되물었다.술을 마셔서 기분이 좋은 탓도 있겠지만 더 이상 비밀을 간직할 필요가 없게되었기 때문에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손 좀 봐줬지!"
"정말로?"
권과 정이 합창을 한다.
"응-"
"듣기만 해도 통쾌한 일인데!"
"뭐 그런 일 가지고....."
"하-하-하-"
그날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술을 많이 마셨는데도 취하질 않았다. 권과 나는 다음 날이 비번이라서 식당문을 닫고 2차를 찾아갈 정도로 마셨다. 총각인 권과 정은 맨하탄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고 나는 부롱스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오랜만에 밤새도록 마신 셈이다. 영실의 배가 불러갈수록 내 긴장과 고민도 그만큼 자라나고 있던 요즈음 모든 걸 잊어버리고 마셨다. 순식간에 걱정거리 없는 세상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하려면 술을 마시면 된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고민도 그 시간에는 정지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술을 버리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영실이 진통을 시작했다. 보험이 없는 우리에게 이 밤은 참으로 암담하기만 하였다. 급하게 차를 몰아 클리닉으로 갔다. 메디케이드에 아이의 운명을 맡겨야 할 판이다. 병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의사와 간호원이 손짓을 하며 뒤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니 Labor Room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멈추어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들어가자고 하여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산실. 나를 발견한 영실은 내 손을 잡고 그저 울기만 한다.
"만규씨 무서워."
"다들 치르는 거야. 너무 겁먹지 마."
더 이상 전해줄 말이 없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겁이 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만규씨 끝까지 같이 있어 줘! 알았지?"
"응!"
"사낼까? 계집앨까?"
"아무 거면 어때! 건강하기만 하면..."
"거짓말!"
"이 상황에 거짓말은?"
"정말?"
"몰라서 물어?"
"걱정돼서 그래."
"무슨 걱정?"
"그래도 맡 며느린데 첫딸이면 어떻게 해? 시부모님 뵐 면목이 없잖아..."
"걱정마. 공연한 생각 그만하고!"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난다. 고향과 연락을 끊고 지낸지도 3년이 넘었다. 지금쯤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장남으로 태어나서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렇게 마음 고생만 시켜 드리는 것 같아 죄송스럽기만 하였다. 정년 퇴직 후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어머니 건강은 여전하신 지? 보고 싶은 얼굴들. 동생과 친구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다.
내 곁에서 이를 악물며 참아 오던 영실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지 머리만 흔들어 댄다. 멀쩡한 정신으로 영실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려니 안타깝기만 했다. 힘이 딸릴 때마다 천주님을 찾으며 용케 견디던 영실이가 이제는 그 것도 소용이 없는지 신음 소리를 뱉어내며 악을 쓴다. 간호원과 나를 향해 욕을 하기도 하고 죽여달라는 애원을 할 때 도저히 눈뜨고 지켜볼 수 없을 정도였다. 보다 못한 내가 의사에게 마취제를 더 투여해 달라고 해도 흑인 여자가 참으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간호원들도 어지간히 애를 쓰고 있었다. 진통을 계속한 지도 벌써 5시간이 넘었다. 영실은 산송장과 다름없을 정도로 몰골이 사나왔다. 잠시 정신을 잃을 때마다 곁에 있는 백인 간호원이 영실에게 힘을 주라고 재촉한다. 그 소리를 듣고 영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힘을 주었다. 드디어 아이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영실은 안간힘을 쓰며 이 괴로운 순간을 넘기려 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내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저렇게 작은 여자가 어떻게 이런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고 아래는 그야말로 피바다였다. 더 이상 방관하고 있다가는 아이와 산모 모두가 위험할 것 같았다. 나는 의사에게 다른 수를 찾아달라고 울부짖으며 매달렸다. 의사는 순산이 바람직 하지만 앞으로 한시간 정도를 더 기다렸다가 수술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태어날 녀석이 제왕이라도 되는 걸까? 갑자기 살모사 생각이 난다. 어미 뱀을 죽이고 자라나는 살모사. 이러다가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이 아닌지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영실이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흑인 의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는지 간호원들에게 수술 준비를 지시했다. 진통을 시작한 지 6시간이 넘었지만 아이는 소식이 없었다. 흑인 의사는 수술 준비를 지시하고도 30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남의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영실의 손을 붙잡은 채 의사에게 서둘러서 일을 처리해 달라고 졸랐다. 드디어 수술 팀이 다 모였는지 영실을 수술 실로 옮긴다. 나는 영실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게 수술 현장을 보이지 않으려는 지 간호원들이 나를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수술실 밖에서 영실을 기다리는 것이 더 불안하기만 했다. 나는 영실의 천주님을 찾으며 아이와 산모를 부탁했다. 30분 쯤 지나자 백인 간호원이 나를 불러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을 담당한 한 의사가 갓 태어난 아기를 거꾸로 들어 엉덩이를 때리고 있었다. 그러자 아기가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다.
"It's a Boy!"
흑인 의사가 축하한다며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들이다! 제왕이다. 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영실의 손을 잡자 언제 깨어났는지 그녀가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 나는 영실의 입술에 나의 것을 얹었다.
"수고했어."
"아들이야?"
"응!"
"잘 생겼어?"
"영실이 닮았어."
"정말?"
"그럼."
"고마워 만규씨."
"내가 뭘?"
"끝까지 같이 있어 준 것 말이야."
"......"
나는 새 생명을 영실의 품에 안겨주었다. 새로 태어난 생명을 바라보니 신기하였다. 조그만 인형 같은 아기가 어른의 모든 것을 다 달고 세상으로 뛰어든 것이다. 아버지 생각이 난다. 나도 이제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나를 처음 안아든 순간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의 아버지?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영실을 회복실로 옮기고 나서 나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서 할아버지가 된 사실을 알려드리니 무척 흐뭇해 하셨다. 옆에서 전화를 듣고 계시던 어머니도 어쩔 줄 몰라 하시며 기뻐하신다. 비록 자식의 곁에서 인생의 낙을 함께 누리지는 못하시는 부모님이었지만 당신들의 손자가 생겼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된 것이 고맙다고 하셨다. 부모에게는 특별한 효도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자손의 번창과 대를 잇는 것이 자식된 도리며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시작인 것이다. 이렇게 라도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3년의 미국 생활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하루하루의 나날이 지옥의 시간이었지만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어서 그나마 조그만 낙원을 할애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영실과 나의 사랑이 생명으로 나타난 것도 지옥에서의 저항이 아니었던가? 우리에게는 고난의 이 땅도 나의 아들에게는 다른 세상이 될 것이다. 우리의 새 생명은 제왕 절개 수술을 받고 나왔으니 제왕의 세월로 세상을 호령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옥이지만 그에게는 천국이 될 미국. 이 땅에서 제왕으로 자라날 아들이 있어서 지난 3년의 고생을 보상받게 된 셈이다. 아들아 못다 이룬 부모의 꿈을 제왕으로 대신 하여주길 바란다.





다 섯.
사람 사는 것이 비극만은 아닌 듯 싶다. 돈만 있으면 안 통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원리.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던 불법체류의 신분도 돈의 위력으로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농장사면으로 법적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다. 있어서도 그만 이지만 없어서 마음 고생을 시켰던 그린 카드의 위력은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돈 5천불로 영주권자의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으니 음지에서 범법자로 살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아이의 이름은 영조라고 지었다. 집안의 항렬을 따져서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다. 태어난 지 네 달밖에 안된 영조는 하루가 다르게 부쩍 자라고 있었다. 3월에 태어난 녀석이 7월이 되더니 제법 재롱을 부리며 피곤에 지친 육신에 활력소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맨하탄 식당에서 경험을 쌓은 나는 일자리를 옮겨 뉴저지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전 보다 좋은 대우로 스카웃이 되었다. 지난번 식당에서 일을 같이 하던 권도 나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는 웨이트리스와 눈이 맞아 동거 생활을 시작했고 야채 가게에서 일하던 정은 내가 일자리를 옮기기 얼마 전에 플로리다로 내려갔다. 야채 가게에서 얼마의 돈을 모으긴 했지만 강도를 만난 이후에는 맨하탄 생활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남쪽으로 내려가겠다던 그의 소원대로 뉴욕의 생활을 청산하고 남쪽으로 내려간지가 벌써 반년 가까이 되었다. 지금은 올란도에서 티셔츠 장사를 한다고 연락이 오는데 그쪽 생활에 만족하는 것 같았다. 뉴저지로 옮겨서 그런지 사람들의 수준도 지난번과는 확실히 달랐다. 지상사 모임에도 전 같은 헤프닝은 없었고 사람들도 점잖게 대해줘서 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람들이 여유가 있다보니 마음이 열려 있었고 그들과 사귀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또한 한인들의 활동 반경이 워낙 뻔해서 사람을 만나자고 작정을 하면 한 다리 건너서 반드시 만날 수 있는 곳이 미국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은 바로 얼마전의 일요일이었다. 보통 휴일 때처럼 정신없이 바삐 움직일 때의 일이다. 손님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서브하기에 바쁠 때 손님 하나가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말은 않고 가만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한참만에 기억이 났는지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강-만-규?"
"누구 신지?"
나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에 적잖이 놀래면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낯선 얼굴은 아니었다.
"너 만규 맞지? 나 찬호야. 송찬호!"
"저..."
"야 임마 저가 뭐야? 9회!"
"송찬호?"
"그래 임마."
서울로 전학 와서 별 볼일 없이 지내던 나에게 따뜻한 말로 관심을 보여주던 동창이 하나 있다. 송찬호. 그 친구를 왜 못 알아 봤을까? 날씬하고 멋 부릴 줄 아는 서울 놈이었는데 그를 몰라보았다. 살이 쪄서 고등학교 때의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 녀석이 나를 반기며 아는 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녀석이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십 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동창은 나이를 먹지 않는 것 같다. 그 녀석은 조건을 따지지 않고 나를 자신의 옆자리에 끌어 앉히고 있었다. 녀석은 손님이었고 나는 그를 서브하는 웨이터의 신분인데도 말이다.
"몰라보겠지? 당연한 일이야. 내가 봐도 이건 심한 편이거든."
"아니야. 자세히 보니까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살다보니 세상이 좁긴 좁구나. 이렇게 만날 꺼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죽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가 봐!"
송찬호가 미국으로 유학 갔다는 소식은 한국에서 언뜻 소문으로 들은 기억이 난다. 녀석은 글재주가 있어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서울 녀석치고는 남 다른 면이 많았다. 인정도 있었고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성정이 고운 녀석이었다. 담임한테 꾸지람 받던 나를 가끔 옹호해 주기도 했고 언제나 따돌림당하기만 하던 내 곁에서 도시락을 같이 먹은 적도 여러 번 있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말대로 세상이 좁긴 좁은 것. 허물없이 대하는 녀석에게 위축감을 느낀 쪽은 바로 나였다. 녀석과 그 동안에 쌓인 회포를 풀기 위해 퇴근 시간까지 기다려 달라고 하니 찬호는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녀석은 밤 11시까지 아무 조건 없이 나를 기다려 주었다. 일을 마친 나는 권과 함께 찬호를 만났다.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모처럼 과거와 만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권과 찬호는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인사를 나누고 쉽게 가까워졌다. 역시 배운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어설피 배운 놈의 가식은 없었다. 나는 찬호에게 그 동안의 생활을 물어보았다.
"유학 왔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냐?"
"이 친구야! 그게 어느 옛날 이야긴데 지금 새삼스럽게... 미국 생활도 벌써 7년째야. 그 동안 결혼도 하고 아들놈도 하나 있어. 너는 어떻게 지냈냐?"
"내 이야기를 다 들으려면 밤을 세워야 할 정도로 기구한 삶을 살아왔지. 호화 유람선을 타고 플로리다까지 왔다가 마이애미에서 그냥 튀었어."
"영주권은?"
"지난 번 농장 사면 때 해결했어."
"능력 있는데! 식구는?"
"결혼해서 아들 하나 있어."
"생활은 어때?"
"그냥 살지 뭐!"
"동창 소식은 들었니?"
"과거와 인연을 끊고 산지 오래 되었어."
"이렇게 만났으니까 서로 연락하면서 지내자. 너도 잘 알다시피 미국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 찾기가 쉽지 않잖아?"
"먹고살기도 바쁜데..."
"이 친구야! 그래도 사는 게 그런 것이 아니라구."
"집은?"
"이 근처야. 너는?"
"브롱스."
"위험하지 않아?"
"비교적 안전한 곳에 사니까 괜찮아."
한동안 술만 마시고 있던 권이 나를 대신해서 친구의 근황을 묻는다.
"송형은 뭘하고 계십니까?"
"조그만 비즈니스를 하고 있지요."
"무슨?"
"잡화를 하고 있습니다."
"재미 좋으시겠습니다."
"그저 그렇지요. 다들 워낙 불경기라서..."
"그래도 사장님 아니십니까?"
"그까짓 이름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그만 하고 술이나 하십시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녀석에게 이곳까지 흘러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전문 대학 시절부터 영실을 만나고 영조를 낳기까지의 내 인생 이야기를. 찬호는 나의 이야기를 싫다하지 않고 연방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귀가되었다. 녀석의 진지한 자세에 그 동안 응어리 졌던 마음의 부담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쏟아 놓을 수 있었다. 오늘따라 술맛이 좋았다. 우리는 맥주를 20병 가까이 비우고 그것도 성이 안차서 양주를 시켰다. 찬호 녀석이 제동을 걸었지만 권과 내가 끝까지 마시자고 우겨서 술판은 새벽으로 이어졌다. 녀석에게 호감을 갖고 대화의 꼬리를 놓지 못하는 쪽은 바로 권이었다. 나도 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 맞는 사람과 속을 털어놓고 내부의 찌꺼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싶은 소망은 소박한 절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술이 우리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권은 많이 마셨는지 발음이 엉키기 시작했다. 비교적 술이 센 그였지만 오늘은 쉽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찬호는 권과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찬호 녀석의 인내가 고마웠다. 싫은 표정이나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녀석이 고마웠다. 식당에서 술상을 마치고 나오니 벌써 새벽 3시가 넘었다. 속이 거북했지만 찬호와 작별 인사를 하고 권을 내 차에 태웠다. 그렇게 퍼 마셨지만 동창을 만난 때문인지 정신은 제대로 가눌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파킹장을 빠져나와서 어퍼 브릿지를 타고 허드슨 강 위를 달리기까지 단 십분도 안 걸린다. 그사이 권은 완전히 인사 불성이 되었다. 다리 밑으로 보이는 허드슨 강이 오늘 따라 한강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서울로 돌아가서 과거의 시간과 만났으면 좋겠다. 동창 녀석을 통해서 서울이 고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기억 속에서도 종로와 세종로는 친근하게 다가오는 거리의 이름들이다. 브릿지를 반쯤 건너왔을 때 조명을 밝히며 내 뒤를 바짝 좇는 경찰차를 발견하였다. 음주 운전으로 걸리면 사건이 심각해 질 것을 염려한 나는 경찰차를 따돌리기 위해서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브롱스 방향의 샛길로 빠져나와 경찰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안심하고 있을 때 어디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경찰차 두 대가 내 앞뒤로 포위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다음이었다. 앞에서 차를 막은 백인 경찰 둘이 뒤에 있는 스페니시 경찰들과 연락을 주고받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내 차로 와서 면허증과 보험카드를 요구했다.동시에 나를 차 밖으로 나오게 한 후 중앙선 위를 걷게 하였다. 동전 몇 개를 바닥에 놓더니 그것을 주워 보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 다음은 한 눈을 감고 코끝을 만져 보라는 것이었다. 상황을 보건대 영락없는 음주 운전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나와 권을 그들이 몰고 온 경찰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권은 인사 불성이라 수갑을 채우지 않았지만 나는 두발을 뒤로 한 채 수갑에 묶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은 토잉카를 불러서 내 차를 끌어가게 한 다음 차를 몰아 미드 타운으로 달린다. 머릿속이 멍하고 가슴이 답답했다. 모처럼 만에 동창녀석을 만나 누렸던 행복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있었다. 나는 백인 경찰들에게 인종차별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냐고 악을 쓰며 반항하였다. 너희 백인 놈들이 유색 인종을 학대한다고. 그러나 그들은 묵묵 부답으로 차를 몰았다. 취중에 짖어대는 헛소리에 그들이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갑자기 영실과 영조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아무 손도 쓸 수 없는 것이 답답했다. 10분쯤 후 미드 타운의 경찰서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나와 권을 끌어내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미국까지 와서 이런 신세가 된다고 생각하니 비참하였다. '결국 2류 인생의 끝이 이런 것이구나.' 경찰서 안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권은 훈방조치 되었고 나는 결국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었다. 30분쯤 지나서 그들이 나를 다시 불러냈다. 나에 관한 웬 서류가 모두 작성되었는지 나를 카메라 앞에 서게 하였다. 그 다음 이곳으로 끌고 오기 전에 했던 모든 행동을 되풀이 시켰다. 직선 위를 걷게 하였고 바닥에 있는 동전을 줍게 하였고 한 눈으로 코끝을 만지게 하였다. 마치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사육사의 지시에 따라 묘기를 보이는 것 같았다. 시키는 대로 따라했지만 우울해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모든 묘기가 끝나자 그들은 단 한번의 전화 통화를 허락했다. 나는 즉시 영실에게 다이얼을 돌렸다. 이 깊은 밤 아니 이른 새벽에 전화를 받은 영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격한 감정을 삭히며 말했다.
"영실이 나야! 영조는?"
"만규씨 지금 몇 신데 전화야? 집에 들어오지 않고!?"
"당황하지 말고 내 말 잘 들어. 지금 경찰서에 있으니까..."
"무슨 일로? 사고 났어? 몸은 괜찮은 거야?"
"별 일은 아니야."
"별 일 아니라면서 경찰서에는 왜? 무슨 일이야?"
"음주 운전."
"......"
"듣고 있어?"
"응!"
"아침에 성당에 연락해서 어떻게 손 좀 써봐."
"......"
"제발 그러지 마. 영실이 마음은 알지만 이미 벌어진 일 가지고 그러면 어떻게 해!"
"어느 경찰서에 있는 거야?"
"잘 모르겠어."
"그것도 모르면서 나보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알아서 해봐!"
"알았어. 내가 알아 볼 테니까 몸이나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
"......"
영실이와 통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유치장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장소로 이송될 낌새였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영실에게 내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못한 것이 도리어 다행이었다. 영실이가 아침에 이곳으로 왔다가 나를 찾지 못하면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십 여 명의 죄수(?)들과 수갑이 채워진 채 벤트럭에 실렸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모두들 삶을 포기한 사람들 같았다. 두 명의 백인은 눈동자가 완전히 풀려서 이미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스페니시가 세 명 있었고 여섯 명의 흑인들 가운데 체격이 제일 좋은 놈이 내 옆에 앉았다. 그놈이 옆에 앉으니 술이 완전히 깨는 것 같았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이런 다짐을 하니까 긴장이 되어서 그런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를 태운 벤이 강변 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보면 다운타운으로 가는 것 같았다. 30분쯤 달렸을까 우리를 태운 벤이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높은 담을 드리운 회섁 철문이 우리 앞에 드러났다. 건물 규모로 봐서 유치장 시설을 제대로 갖춘 헤드 쿼터 같았다. 우리 일행이 모두 벤에서 내리고 나니 두 사람 씩 한 조가 되어 유치장으로 각각 분리 수감되었다. 나와 같은 방을 배정 받은 놈은 차안에서 내 옆에 앉았던 바로 그 건장한 흑인 녀석이었다. 녀석의 덩치도 문제였지만 미국이라는 나라가 별 희한한 잡놈들이 들끓는 요지경 세상이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하였다. 유치장 안은 벽과 맞대어 침상이 있었고 안쪽 깊숙이 변기가 놓여있었다. 그 친구가 먼저 침상에 눕더니 나에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우선 가볍게 몸을 푼 나는 침상 옆의 좁은 공간에서 태권 기본 동작을 취하였다. 다리를 들어 허공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발끝으로 가공의 인물 명치를 가르는 시늉도 지어 보았다. 권투로 단련된 솜씨로 상대를 넉아웃 시키는 펀치도 날려 보곤 했다. 이렇게 해서라도 덩치 큰 흑인 녀석에게 무언의 경고를 주는 편이 신상에 안전할 것 같았다. 그러나 침상에 누운 녀석은 나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벽을 향해 눕더니 코를 골고 있었다. 녀석은 처음부터 나 같은 놈한테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내 자신을 생각해보니 너무 우스웠다. '한심한 놈. 이렇게 소심한 놈이 일은 어떻게 저질렀누?' 영조 생각을 하니 그저 부끄럽기만 하였다. 말도 못하는 아들놈이지만 이 처지를 어떻게 보일 수 있을까? 유치장 안에서 몇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누군가 방방을 돌며 헴버거를 돌리고 있었다. 벌써 아침이 되었나 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장 끼를 느끼는 동물성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는 것도 우스웠다. 목구멍이 메이면서 헴버거를 먹어 치웠다. 뱃속에 먹을 것이 들어가니까 식곤증이 몰려왔다. '이왕에 벌어진 일 어떻게 해결이 되겠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눈을 잠시 붙였다. 온몸에 땀이 나고 실내가 더워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아침때와 마찬가지로 누군가 방방을 찾아다니며 헴버거를 돌린다.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나 보다. 한끼를 이곳에서 먹고나니 점심은 수월하게 목구멍을 넘어간다. 그사이 현실을 인정하고 상황에 적응한 자신이 놀라왔다. 점심을 먹고 나자 경찰이 와서 관선 변호사가 배당되었다며 나를 데리고 면회실로 갔다. 관선 변호사는 의례적인 질문만 하고 나의 개인적 상황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의 다분히 사무적인 태도에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변호사는 면담을 마치고 어디론가 가버렸고 그가 사라진지 얼마 안되어 누군가 나를 이끌고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영실과 식당주인이 앞자리에 함께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길 헐. 반갑기도 했지만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면목이 없었다. 보석금을 치루고 풀려났다. 영실은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상관 않고 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보석금 영수증과 법정 출두서를 주는 법원 서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너무나 사무적인 그의 행동에 나 같은 놈이 한둘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후 한시가 되어 법원 밖으로 나왔다. 냄새나고 불결한 공간에서 풀려 난 것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새로운 삶이라도 받은 느낌이었다. 나를 위해 어려운 시간을 내어준 식당 주인이 미리 준비해온 두부를 내게 내밀었다. 두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는 그의 뜻이었다. 영실이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연방 허리를 굽힌다. 발등의 불을 끈 주인은 식당 일이 바빠서 간다며 영실과 나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나는 영실의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날 집에서 가족들과 휴식을 즐겼다. 모처럼 만에 갖는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었다. 저녁에는 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될 뻔했던 권이 미안하다며 연락을 한 것이다. 나에게 이런 불상사만 없었다면 권도 찬호와의 만남이 좋았을 것이다. '찬호한테 연락해서 다음에 술이나 한잔 더하자.'라고 하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음주 운전으로 당한 피해는 보통이 아니었다. 벌금으로 물은 돈이 몇 백불이었고 변호사비로 쓴 돈도 만만치 않았다. DWI의 벌점이 높아서 보험료가 두 배나 올랐고 의무적으로 4주간 금주학교에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식당 일에도 지장이 많았다. 더군다나 면허 정지로 발목이 묶인 것을 감안하면 술이라고는 냄새도 맞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생각 같아서는 이번에 술을 완전히 끊고 싶었지만 의지가 약한 탓인지 그렇게 못하고 조심해서 마시기로 하였다. 절대로 폭주하는 일은 없었고 술을 마시면 되도록 운전은 안 하게 되었다. 영실은 내 생활이 불규칙하다며 나를 끌다시피 하여 성당에 다니게 하였다. 천주님의 종이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영조의 돐도 지나고 영실의 몸도 전처럼 회복되었다. 몸을 가눌 만 하니까 영실의 입에서 염병처럼 공부 이야기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집념보다 병에 가까운 현상이었다. 공부가 영실의 꿈이라면 그녀의 뜻대로 해주고 싶었지만 이제는 영조가 있기 때문에 그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의 병적인 집념을 꺾어야지 영조가 잘 자랄 수 있다. 영실에게 자기 사업을 통해 정신없이 바쁘게 해 주는 방법이 가장 현명할 것 같았다. 남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영실을 붙들어 메기 위해서도 일을 벌려야했다. 식당 주방에서 사업 정보가 흘러나왔다. 주방장의 고향 친구가 생선가게를 하다가 사업을 정리한다는 소식이었다. 사업 경험은 없지만 영실과 아들놈을 위해서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될 것 같았다. 일을 결정하면 두 번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내 성미였다. 좋은 기회다 싶어 영실에게 말했더니 의외로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둘이 살 때는 몰랐는데 영조가 생긴 후로 식당 일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가 결국 음주 운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영실의 생각이었다. 그 동안 모은 돈이 조금 있었지만 사업을 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에 성당의 신용금고에서 융자를 받아서 가게를 인수했다. 어렵게 장만한 돈이었기에 반드시 성공해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생선가게도 사업이라고 개업 파티를 했다. 성당 사람들과 식당 친구들이 와서 북적거렸고 신부님이 천주님의 가호를 기원하며 개업기도를 해 주셨다. 이번에는 뭔가 제대로 되어갈 것 같았다. 불행의 그림자나 불길한 징조가 안보였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가게 손님들은 주로 저소득층의 흑인이었는데 이들이 생선 튀김을 좋아하는 것이 뭔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새롭게 단장한 가게라 그런지 처음부터 손님들로 붐볐다. 가게가 바쁘다 보니 영실이도 영조를 데리고 나와서 열심히 뛰었다. 나는 새벽마다 헌츠 포인트로 뛰어 다니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은 자연스럽게 우리 앞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그러나 세상 사는 것이 우리들의 열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가게가 있는 몰(mall)에 마약 장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가게 앞에서 공공연히 약을 팔았으며 심지어 우리 가게 안으로 들어와서 거래를 하기도 하였다. 견디다 못해 경찰에 연락을 하면 그 때 뿐이었고 그들을 연행해가도 잔챙이 들이라서 이내 석방되곤 하였다. 주위의 환경이 갑자기 나빠지니까 손님들의 발길도 전 같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운송업자의 파업으로 생선 값이 올라 적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영실이도 두 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어느 것 하나도 내 힘으로 풀기에는 어려운 것들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닫고 다른 사업을 벌리고 싶지만 성당에서 융자받은 것이 있어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돈을 끌어썼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가게 문을 연지 8개월만에 눈물을 머금고 사업을 정리해야 했다. 더 이상 앉아서 돈 까먹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빌린 돈도 문제였지만 영실이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앞날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약장수들과 적자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내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식욕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서 쉽게 어지러움을 느꼈다.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이 예사였기 때문에 잠자리에 드는 것도 겁이 났다. 수면 부족 때문인지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4개월을 보내니 체중이 20파운드 이상 빠졌다. 가게는 정리되었지만 몸이 이러니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귀찮고 삶에 의욕이 없었다. 보다 못한 영실이 나를 집에서 쉬게 하고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생활력이 강한 그녀였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남보다 잘 하겠지만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하였다. 식당 일이나 야채가게의 케시어 혹은 봉제 공장에서 밟아라 밟아라가 기다릴 뿐이다. 영실의 성격상 웨이트리스나 케시어는 처음부터 싫었을 것이다. 일을 하더라도 대인 접촉이 많지 않은 봉제 공장이 그녀에게 적합하였다. 결국 봉제 공장의 일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영실이는 악착 같이 일을 했다. 마치 일을 통해서 현실의 괴로움을 잊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공장에서 밤늦게 까지 일하고도 모자라 집으로 일거리를 들고 올 정도였다. 그러니 불쌍한 놈은 바로 영조였다. 집에 있는 아버지라 해봤자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고 있지 엄마는 하루 종일 바깥에 일하고 와서도 홈워크로 정신이 없으니 말이다. 영조는 완전히 천덕꾸러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온 불행은 아직도 그 끝이 보이질 않았다. 우리가 힘들에 버티고 있는 운명의 무게는 하루가 더해질수록 우리 가족을 전보다 더한 무게로 짓누르는 것 같았다. 운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영실에게 드리운 것은 그녀가 밟아라 전선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였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먼지와 싸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날 따라 영실은 오버 타임으로 보통 때보다 늦게 공장에서 나왔다. 보통 때처럼 영실은 두 손에 홈워크 보따리를 들고 서브웨이에 올라탔다. 부롱스 행 지하철은 다른 어느 노선보다 위험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만 교통 하나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편하였다. 영실의 안전을 위해 출퇴근 시간만은 사람들이 붐비는 때에 하라고 일러주었지만 그날은 오버 타임으로 러시아워를 피해 탔기 때문에 사람들도 별로 붐비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걱정되던 차에 그나마 할렘 근처에서 대부분의 승객이 내렸다. 피곤에 지친 영실이 주위를 경계하지 않고 졸고 있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브롱스 역에서 내리자 흑인 녀석 둘이 영실의 앞뒤로 가로막고 그녀의 보따리를 낚아챘다. 영실은 반사적으로 빼앗긴 보따리를 찾으려고 팔을 내밀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 스페니시 녀석이 영실의 가방을 들고뛰기 시작한다. 사정이 이렇게 급박한데도 영실은 혼자의 힘으로 가방을 들고 도망가는 녀석의 뒤를 쫓아가려 했다. 그 순간 영실의 뒤에 있던 흑인 놈이 다리를 걸어 그녀를 넘어뜨리고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악착같은 영실이 흑인 녀석의 발을 잡고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보따리를 들고 있던 다른 놈이 합세하여 덤벼들었다. 발길질을 하는 놈들이 영실의 배를 공격하지 않을 리는 만무했다. 영실은 '앗!'하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았다. '천주님!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신을 잃고 플렛포옴에 쓰러져있는 영실이 다른 사람의 손길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음 지하철이 도착하고 나서였다. 브롱스 역에서 내린 흑인 여자가 911에 연락을 하였고 영실은 긴급히 달려온 구급차에 실려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전화를 받고 병원을 찾았을 때 영실은 정신을 차린 듯 침대 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로 그녀를 위로해야 할 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이다."
"영조는
옆집 김선생 댁에 맡겼어. 몸에는 이상이 없데?"
"아까 하혈했어....."
"죽일 놈들. 악착같이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미안해..."
"......"
"만규씨 상심하지마. 천주님의 ....흑-흑-"
천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라는 것 같았다.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 영실. 나는 영실을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왜 이렇게 무겁고 어두워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 몸을 추수리고 나면 일자리를 다시 알아 볼 꺼야
그 몸으로?"
"당신은 집에서 조리를 해야 할 꺼 아니야?"
".... 만규씨 우리 악착같이 살자. 영조도 있잖아!"
"......"
영실의 사건 이후 우리의 생활은 생각과 달리 여러 면으로 위축되고 있었다. 망할 놈의 자식들 때문에 영실이 유산을 하였고 나는 직장은 고사하고 몸조리를 하느라 여간 고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열심히 살자는 말로 위로를 해 주었던 영실이도 전 같은 자신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한 어머니의 신분으로 뱃속의 아이를 잃은 상심과 죄책감이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잃은 아이에 대한 영실의 집착은 일종의 신들림 같은 것이었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한 영실이 밤마다 헛소리를 하였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는 일은 예사였다. 영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우리 형편으로 둘 다 손놓고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영실의 상태와 비교해서 건강한 편인내가 다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배운 것이 식당 일인지라 그 일이 편하였지만 웨이터 일을 하기에는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다.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권이 퀸즈에 있는 캬바레에서 기도 겸 멤버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밤일을 해야 하지만 식당 일 보다 육체적으로 쉬웠기 때문에 캬바레 주인을 찾아갔다. 주인 여자가 권의 소개로 왔다고 하니 정색을 하며 반긴다. 권과 각별한 사이 같았다. 그녀와 간단한 인터뷰를 나눈 다음 이틀 후부터 일을 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미국의 밤이 서울과 다를 것으로 생각했던 나의 추측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밤의 세계는 낮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일상의 것들이 훤히 드러나곤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불법 체류자들이 힘들게 모은 돈을 술집에 바치는 것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고향의 처자를 위해 돈을 벌던 일념이 세월의 침식으로 조금씩 변하다가 마침내 무감각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과거와 인연을 끊고 현실의 쾌락과 타협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두고 온 고향과 보고 싶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현실과 분리되는 순간 이들은 밤의 노예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술과 여자에 중독되어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그들을 이곳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레이스라는 여자도 여기서 알게 되었다. 한국의 기지촌 출신 이 아가씨는 국제 결혼으로 미국에 건너온 여자였다. 텍사스에서 3년 간의 결혼 생활을 한 그녀의 과거는 밤의 세계가 보여준 또 다른 비극의 단면이었다. 남편을 믿고 온 미국이었지만 현실은 그녀가 기대했던 것과는 딴 판이었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미국까지 데리고 온 아내를 술집으로 내 보내었고 아내가 술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미국 년을 차고 즐기는 놈을 남편으로 둔 여자의 신세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말도 안 통하는 영어로 투정도 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손찌검밖에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객지에서 개죽음을 당할 것 같아 이혼을 한 다음 뉴욕까지 굴러왔다는 것이다. 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지만 화장 뒤에 숨겨진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이 바닥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면 결국 몸파는 일로 전락하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그레이스가 짙은 화장으로 나이를 숨기려는 것도 자신의 운명을 최대한으로 연장하기 위한 발악일 지 모른다. 밤 세계의 대다수 여자들이 단어만 다를 뿐 그레이스와 다름없는 인생의 전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 같은 놈의 삶은 이들의 운명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끝없는 불행 속에서도 끈질긴 삶의 무엇이 그레이스와 같은 여자들을 붙들고 있을 것 같았다.
영실의 건강은 특별한 진전 없이 비슷한 상태에서 왔다 갔다 했다. 헛소리와 식은땀.체구는 비록 작았지만 언제나 당차고 자신감이 넘쳐나던 영실의 옛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이 어렵다 보니 별 유행이 다 생기고 있었다. 예수재림의 열풍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울에서 일기 시작한 열기가 뉴욕으로 공수되어 어려운 형편에 허덕이는 교포들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이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보통 성화들이 아니었다. 성당에 다니면서 비교적 냉랭한 믿음으로 천주님을 찾던 영실이도 결국 이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자기 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영실이가 언제부턴가 새벽마다 기도회다 하여 집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믿음으로 우리 가정이 되살아 날 수 있으며 앞으로 있을 예수재림을 위해서도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현실의 모든 고난은 마귀의 권세 때문이며 공중 재림하실 예수를 믿을 때 모든 고난도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 영실의 지론이었다. 여자의 자신감은 처음부터 기초가 없는 가상의 것이 아닐까? 몇 차례의 좌절 가운데도 잡초처럼 되살아나던 용기가 언제부턴가 고개를 들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실의 경우는 아기를 잃은 상심으로 시작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미국의 실상이 그녀의 꿈과 일치되지 않는 것을 일련의 사건을 통해 늦게나마 깨우친 것뿐이다. 마침내 그녀도 미국의 현실을 피부로 익힌 셈이다. 늦게 배운 도적질 밤 세는 줄 모른다는 옛 말처럼 영실의 신흥 종교에 대한 열정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기도원이다 전도 집회다 하여 쫓아다니다 보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세 살이 다 된 영조였지만 어른의 손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하려하지 않았다. 일이 이쯤 되니 집에 누가 있어서 영조를 돌보지 않으면 아이의 장래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할 수 없이 성당에서 만난 노파를 집에 모시고 영조의 뒷바라지를 부탁드렸다.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의 반이 노파의 손에 들어갔지만 아이를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되니 집안은 흡인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영실의 믿음이 불같이 뜨거워지는 지는 몰라도 그만큼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광신적인 믿음이 커지는 만큼 그녀에 대한 나의 기대는 반감되고 있었다. 불같은 믿음으로 영실이 하늘로 들리 우는 복을 누릴지도 모른다. 하기야 영실은 천주님의 심복이 아니었던가?
밤의 세계에 적응하는 것이 내게 있어서 또 하나의 탈출일 수도 있었다. 영실이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믿음이나 내가 밤의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손님과 아가씨를 연결시켜 주는 일이 짭짤한 수입이었기 때문에 멤버들은 이 일을 요령 있게 처리해야 한다. 손님들 가운데는 뼛골이 빠지며 중노동으로 모든 돈을 이렇게 공중으로 날리는 사람도 많았다. 술 취한 손님과 아가씨들 사이에 벌어지는 궂은 일도 내가 맡아서 처리했다. 이런 일로 아가씨들과 자연스럽게 사귈 수 있었고 어떤 아가씨는 은근히 나의 관심을 끌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사실 하룻밤의 술손님이나 몸손님으로 진정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아가씨들이 나 같은 쑥맥에게 관심을 갖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밤의 요정들을 이해하고 나면 이들보다 불쌍한 사람들도 없는 것 같았다. 그레이스도 그렇지만 이 곳에서 일하는 많은 아가씨들이 하나같이 슬픈 과거를 현실로 살아가고 있었다. 정숙하고 믿음이 강한 영실이 나의 이상형이라면 이 여자들에게서는 삶에 대한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실이처럼 갈 수 없는 나라를 찾아다니며 하늘로 들리울 꿈을 꾸지는 않지만 하루를 열심히 사는 이 여자들의 몸부림이 훨씬 더 역설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생리에 눈치가 생기고 사람들을 많이 사귀고 나니 수입이 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토록 목을 죄어오던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다. 일에 자신이 생기고 사람들과 여유 있게 지내다 보니 아가씨들의 유혹이나 추파가 노골적인 단계에 이를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다른 여자들과 달랐다. 언제나 솔직하고 대담해서 나를 동생 정도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아마도 그날 밤의 헤프닝만 없어도 우리 사이는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 밤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비도 내리고 손님들이 없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하던 아가씨들이 장사도 파장하고 술판을 벌리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아가씨들과 섞이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와 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미스터 강! 족발 집으로 와.""......"내가 아무 대꾸도 없자 그녀가 다시 속삭인다.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꺼야.""......"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나를 향해 그녀가 윙크를 한다. 나는 덤덤하게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 호기심을 느끼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한시간이 지나도 손님은커녕 쥐새끼 그림자도 안보일 정도로 홀 안은 한산했다. 밖에서 내리는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없어도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뜨지 않게 몰래 홀을 빠져나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레이스를 생각하며 족발 집으로 갔다. 생각했던 대로 장대비가 내리고 있어서 밤거리는 한산했다. 빗물을 훌훌 털고 족발 집으로 들어서자 그레이스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소주를 반병이나 비운 그녀의 표정이 늘 보아왔던 평상시의 그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앉아있는 자리로 다가갔다. 그때서야 반색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안 올 줄 알았는데...."
"......"
"비도 오고 그래서 마음이 여간 허전해야지. 그래서 미스터 강이랑 소주라도 한잔하고 싶었어. 술친구 되어줄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는 나의 반응이 반가웠던지 그녀가 마시고 있던 소주를 맥주 잔에 따라서 나에게 건네었다.
"한잔 해!"
"......"
"비 오는 날이면 괜히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고 뭐고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멀리 떠나고 싶어져.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엑스 허스밴드 톰 생각도 나. 그놈이 하는 짓은 개 같아도 영화 배우처럼 잘 생겼거든. 밤에는 섭섭하지 않게 기쁨을 주기도 했어. 이런 신세가 될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기지촌을 떠나지 말 걸 그랬어. 그 땐 나도 있기가 있었거든."
"......"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비우고 있던 나에게 무슨 호감이 가는지 그녀가 말머리를 돌려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미스터 강은 어떻게 해서 이런 데까지 흘러 왔어? 처자가 있다고 하던데..."
"......"
"술만 마시자 이거지! 좋아. 술만 마셔 우리."
그녀가 나의 빈 술잔에 소주를 다시 따랐다. 내가 술병을 받아 그녀의 소주잔에 부으려 하자 그녀가 건조한 말투로 내게 말을 했다.
"편 한대로 살아. 그냥 마시면 어때서?"
"......"
"나 같은 년하고는 말도 하기 싫어?"
"......"
"미스터 강! 내 꿈이 뭔지 알아? 크게 성공해서 서쪽으로 옮기는 거야. 미국은 큰 나라니까 서부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고 싶어. 그 곳에는 나의 과거를 묻는 사람도 없을 꺼야. 어떻게 성공하냐구? 그건 나도 몰라. 매주 두 번씩 복권을 사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내게도 운이 있을 것 같아. 내게 남은 믿음은 사실 그 것밖에 없거든. 재수야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희망이라도 있으니까 행복할 수 있거든. 어때? 내 꿈이 그럴 듯하게 들리지 않아?"
"......"
"미스터 강!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한 번쯤 이렇게 따로 만나고 싶었어.... 과묵하고 듬직한 미스터 강같은 사람을 진작에 만났더라면 내 팔자도 이렇지는 않았을 꺼야."
"......"
"미스터 강을 보고 있으면 그 새끼 생각이 나. 톰 말이야. 어깨가 벌어지고 균형 잡힌 체격에 준수한 생김새가 내 엑스 허스밴드랑 비슷하거든."
그녀의 말을 들으며 나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빈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래 술이나 마셔 우리. 비오는 날에 마시는 술은 훨씬 맛이 있거든."
"......"
"미스터 강! 행복해?"
"별로...."
"말 못하는 벙어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 히-히-"
"......"
"왜? 처자가 있다면서."
"그게...."
"할 말이 있으면 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살 수 있으니까. 부담 갖지마. 나도 미스터 강이 좋아서 보자고 한 건데 뭐!"
술 한잔을 더 마셨다. 빗물에 섞여 내려오는 세상의 모든 술을 몸 속으로 부어 넣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침묵을 깨고 모든 것을 토해냈다. 내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을. 그리고 그레이스의 몸에 빠지고 싶다는 것까지도. 영실은 재림 예수의 신비에 빠지고 난 다음부터 밤을 기피하였다. 오래 전에 엄마의 역할을 포기한 그녀에게 아내의 의무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실은 천주님과 재림 예수 외에는 별 다른 관심도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부부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여자를 경험한 지도 벌써 몇 달 전의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그레이스가 나에게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원하면서도 한사코 운전을 한다고 차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붙잡으며 그레이스가 만류한다.
"미스터 강! 술이 많이 취했는데 괜찮겠어? 빗 길에, 더군다나 술에 취해서 차를 몬다는 것은 자살 행위야!"
그녀는 나의 이중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를 원하면서도 남편의 양심을 저버리지 않으려는 나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스터 강! 고집부리지 마. 우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택시타고 가면 금방이거든.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차를 어떻게 몬다고 그래! 내가 하자는 데로 해. 우리 집에 가잔 말이야."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내며 엎어져 있던 나를 치켜세우는 그녀의 몸에서 향기로냄새가 흘러 나왔다. 여자의 체취. 혼미함 속에서도 잠들고 있던 욕정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피가 몰리고 있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그녀가 내 등뒤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의 젖무덤이 등으로 느껴졌다. 풍만하고 잘 익은 홍옥 같은 것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어차피 세상은 공평한 것이 아닌가?영실이 천주님과 재림 예수를 찾고 있다면 나는 지상의 권세와 쾌락을 찾고 있을 따름이다. 천국을 바라보면서 이 땅의 중생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레이스의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아직까지도 장대비가 굵은 선을 그으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자연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일부러 몸을 밖으로 내밀어 비를 맞았다. 순식간에 온 몸이 젖어 들었다. 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그레이스도 빗속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좋아?"
"......"
나는 대꾸도 없이 빗속에 드러난 그녀의 몸매를 훑어보았다. 숨김없이 드러난 그녀의 몸매에서 어떤 야생성을 찾을 수 있었다. 잘 다듬어진 가슴과 둔부의 곡선이 거장의 동상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의 욕정이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는 빗속에서 몸을 맞대고 서로의 입술을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감미로웠다. 달콤한 그녀의 입술에는 불이 붙어 있었다. 피가 몰린다. 우리는 빗속에서 입술을 떼지 않고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빗 길을 가르며 달려오는 헤드라이트가 우리 앞에 와서 멈췄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레이스의 몸에서 떨어져 우리 앞에 멈춘 차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스가 부른 콜택시였다. 택시 안으로 흘러 들어온 두 몸이 엉키기 시작했다. 내 손이 그녀의 몸 속을 더듬어 들어갔다. 그레이스가 운전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자 차는 빗속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운전사가 백 미러로 흘끔흘끔 훔쳐봐도 우리는 그것에 개의치 않고 몸을 달궈가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그녀 속에 숨겨진 광맥을 찾고 있었다. 더 이상 차안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빗속을 달리던 택시가 마침내 멈추었다. 우리는 차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아파트로 올라갔다. 킹사이즈의 침대가 조그만 스트디오를 모두 덮고 있었다. 그녀가 내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더니 온 몸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나를 다루는 그녀에게 나는 한 마리의 작은 새에 지나지 않았다.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의 몸에 작은 지진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알몸이 되어 침대 위에서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완벽한 리드에 나는 노예가 되어가고 있었다. 완전한 쾌락으로 이끌어가는 그녀의 행위는 완벽한 예술이었다. 그녀의 경건한 몸놀림에 나는 숨소리를 죽여가며 떨리는 몸을 참고 있었다. 나의 거친 손길과 가쁜 숨소리를 마다 않고 그녀는 자신의 몸놀림에 몰두하고 있었다. 영실이 그렇게 고대하는 천주님과 재림예수의 천국을 나는 그레이스를 통해 이 땅에서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녀의 모든 탐색 과정이 끝났는지 마침내 나의 몸을 덮었다. 그녀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지긋이 감은 두 눈이 진실되게 보인다. 몸을 곧게 세운 그녀의 전신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탐스럽고 완벽한 작품이었다. 어느 예술가의 솜씨로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빚어낼 수 있단 말인가? 신의 창조라 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 여자를 스쳐갔던 남자들을 생각해 본다. 이름 모를 GI들 그리고 톰이라는 엑스 허스밴드... 그레이스를 빼앗기기 싫어 미국까지 데리고 온 톰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몸 위로 끌어 올린다. 위에서 내려다 본 그레이스의 얼굴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화장기가 지워진 그녀의 얼굴에 유난히 붉게 타오르는 입술. 나는 잡념을 떨치고 생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오랜 참아온 합일의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녀는 격렬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수분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들이려는 그녀의 노력에 나는 천국으로 들어간다. 천국. 그레이스가 미동도 않고 나를 받아들인다. 나의 몸동작이 격렬하고 빨라진다. 천국에 들어가려는 집념으로 또 한번의 낙원. 밤사이로 소리가 지나간다. 빗소리 사람소리 섞이는 소리. 지상의 소리. 그녀의 몸에서 내려온다.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레이스도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우리의 운명은 이 밤에 하나가 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운명의 끈이 우리를 하나로 묶어가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자유롭게 해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여 섯.
영실의 재림 예수에 대한 믿음은 현실의 붕괴를 약속하며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 현실에서 실패를 거듭하던 그녀의 꿈은 교회 속에서 새로운 희망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녀의 열성은 언제나 대단했기 때문에 누구에겐가 쉽게 주목되곤 하였다. 전도대회에 쫓아다니면서 꼴을 받아먹던 영실이가 이제는 스스로 전도사가 되어 불쌍한 영혼을 구할 정도로 재림 예수단의 중앙부로 들어선 것이다. 영조도 이제는 세 살이 넘었다. 집에 모셔둔 노파가 고맙게도 영조를 친 손주처럼 잘 돌보아 주셨고 영조도 친할머니처럼 잘 따랐다. 친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영조에게 자신을 끔찍히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래도 녀석의 복이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인연이었지만 여생을 영조와 더불어 보내려 하는 노파의 마음이 고마웠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엇갈리는 인연 속에서 누군가의 조정에 의해 행복을 균등히 분배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영실에게는 재림 예수교가 영조에게는 노파가 나에게는 그레이스가 있어서 나름의 행복을 공급받고 있었다. 그레이스는 나의 밤에 없어서는 안될 파트너가 되었다. 비록 그녀의 꿈은 아직 이루지지 않았지만 영실의 집착만큼이나 대단한 것이어서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레이스와 가까워진 후로 나는 그녀의 신상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한국 이름이 다해라는 것과 나와 동갑내기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다해라는 이름의 내력은 어촌 출신의 아버지가 바다처럼 풍요하게 살라고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이 가난 속에서 그녀가 겪은 인생의 험난한 고통만큼은 바다처럼 풍부했을 것이다. 그녀의 운명이 이름을 타고 난 것은 아닐까? 다해와 함께 나누는 밤의 시간은 영실과 나누었던 몇 년과는 완전히 다른 풍요의 나날이었다. 다해는 날마다 새로운 밤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의 과거를 모두 벗어 던지고 나를 위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다해의 서방으로 행세한 적도 없었지만 다해는 나 외에는 누구하고도 밤을 나누지 않았다. 언젠가는 새 일자리를 찾아보겠다는 말도 했다. 다해는 나와 관계를 계속하는 동안 마침내 술집을 그만 두었다. 그녀 스스로 더 이상 밤의 요정임을 거부하기로 한 것이다. 몸으로 밥벌이를 하던 여인이 일 손을 놓게 되었지만 그렇게 해야 나에게 떳떳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밤일을 그만 둔지 몇 주가 지나서 다해는 새 직장을 구했다며 신이 나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만규씨! 새 일자리를 구했어."
"이따가 만날텐데 전화는 뭐 하러 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만규씨한테는 먼저 알려주고 싶었거든...."
"그래! 잘했어. 새 직장은?"
"멘하탄에 있는 네일 살롱이야."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
"아니! 저녁상 준비해 놓을 테니까 언제든지 와."
"그래. 그렇게 할께."
"사랑해 만규씨!""......"
전생의 업보처럼 지겹도록 따라다니던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고 새롭게 살아가려는 다해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그녀에게서 변형된 삶을 되돌려 놓으려는 생의 의지가 숨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실에게서 잃어 가는 것을 다해를 통해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다해였다면 남의 손발을 씻고 다듬는 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힘든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청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부스러기 돈이라 할지라도 보람있게 번 돈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전까지 만져봤던 어떤 돈보다 귀중했던 것이다. 다해를 만나는 일은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바깥으로 나도는 영실의 눈을 일부러 피할 일도 없이 우리는 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었다. 다해는 자신의 변화가 모두 나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나를 끔찍이 대하여 주었다. 그녀의 모든 시간이 나를 위해서만 존재한다며 온갖 정성으로 나를 섬겼다. 나는 스스럼없이 그녀를 소유하게 되었고 나에 대한 믿음으로 그녀의 삶도 전 보다는 의미 있어 보였다. 다해에게는 천주님이라는 단어도 존재하지 않았고 재림 예수교의 소문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강만규가 천주님 이었으며 재림 예수교의 주인공이었다. 다해는 처녀 때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오입질하기에는 다해보다 좋은 조건을 가진 여자가 없겠지만 나는 이런 다해가 불쌍하기만 하였다. 다해에게 아이를 하나 만들어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조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 때마다 다해는 영조를 만나고 싶다는 말로 나에게 매달렸다. 비록 그녀 자신은 석녀라 할지라도 영조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강만규와 도 더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영조와 다해가 만난다는 것은 우리의 관계를 영실에게 털어놓는 것이라고 하여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다해는 괜한 걱정은 하지 말라는 말로 나의 입을 막았다. 고모도 될 수 있고 고향 친척도 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모도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다해가 그 정도로 나오니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성당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영조가 그들을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을 테니 어떻게 둘러대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다해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고 영조와 대면 날짜를 정하였다. 점심 시간에 영조를 데리고 그녀의 일자리를 찾아갔다. 윈도우밖에 서있는 우리를 발견한 다해가 하던 일을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주인 여자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는지 쉽게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영조를 발견하자 몸을 굽혀 끌어안았다.
"영조 안녕?"
"......"
처음 만난 여자가 자기를 끌어안은 것이 어색했는지 녀석은 말이 없었다. 영조는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자 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다해는 실망하지 않고 영조에게 손을 내밀며 숨겨 두었던 사탕을 보여 주었다. 영조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빠의 의향을 살피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받아."
나는 영조를 안심시키며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아줌마"
"welcome!"
영조가 마음을 풀자 다해가 밝은 웃음을 보이며 다시 영조를 끌어안았다. 사탕 하나에 영조는 기분이 좋았는지 다해의 품속에서 가만히 있었다.
"영조 많이 컸구나. 아줌마가 처음 봤을 때는 갓난 아기였었는데..."
"..."
나는 다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영조야! 아줌마 기억 안나니? 아줌마가 영조를 제일 이뻐했었는 데도?"
"아니..."
영조는 이제 다해를 받아 들였는지 사탕을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대답을 한다.
"영조가 아줌마를 벌써 잊어 버렸구나. 영조가 아줌마를 잊어버렸으면 아줌마는 슬퍼서 어떻게 해?""아니야. 어쩌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해."
"정말? 아이 좋아라. 영조가 아줌마를 기억하니까 기분이 좋은 걸. 오늘 아줌마가 영조 좋아하는 것 모두 사줄꺼니까 뭐든지 말해."
"진짜?"
"물론이지."
"그러면 우리 밥먹고 토이 스토어에 가. 거기 가면 내가 갖고 싶은 게 많이 있거든.알았지? 아줌마 약속이야. 새끼손가락 걸고 자- 이렇게..."
다해의 지혜로 우리는 졸지에 한 가족이 되어 버렸다. 경계를 푼 영조는 다해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할머니하고 있던 영조가 젊은 여자의 손을 잡게되어 좋은 것이분명했다. 영조와 다해는 쉽게 친해졌다. 우리는 고급 양식집에서 점심을 먹고 영조와 약속한 데로 토이 스토어에 갔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영조는 신이 나서 스토어 안을 뛰어 다녔다. 영조의 모습이 너무나 천진난만했다. 다해가 내 손을 살며시 잡으며 귓속말로 속삭인다.
"만규씨 꼭 빼 닮았어. 기분 좋지 않아?"
"......이렇게 오래 나와 있어도 괜찮아? 주인이 뭐라고 할텐데."
"오늘은 안 들어가도 괜찮아. 주인한테 허락 받았거든. 결혼 기념일이라서 아이하고 아빠가 온다고 그랬지 뭐!"
"결혼 기념일?"
"그냥 지어낸 핑계야. 너무 신경 쓰지마."
"다해가 결혼을 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영조는 아빠를 꼭 뺐다고 하던데!"
"아무렴 내 아들인데."
"그게 아니고 나보다 만규씨 더 닮았다는 거야!"
"그래?"
"남들이 보면 단란한 가정이라고 생각하겠지? 싫지 않은데."
"......"
"영실씨는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그래. 하루하루 더 열성적으로 되어 가는 것 뿐이야. 저 녀석만 불쌍하지...."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 친 엄마는 아니지만 자신...."
"......"
"내 새끼는 비록 낳지 못하지만 만규씨처럼 사랑해 주면 되잖아."
"......"
"승낙으로 받아들이면 될까?"
영조가 작은 몸으로 장난감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다해는 영조의 장난감을 하나도 빼내지 않고 전부 사주었다. 지금까지 영조가 이렇게 행복해 하는 것을 본적이 없다. 영조는 지금 세상에 태어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줌마 고맙습니다."
영조가 몸을 낮춘 다해에게 달려가 뽀뽀를 한다.
"아줌마! 우리 또 만나! 응?"
"정말?"
"아줌마가 울 엄마였으면 좋겠어. 장난감도 사주고 ... 약속했어. 또 만날 꺼지?"
"그래 약속."
영조와 다해는 다시 한번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 의식을 가졌다. 헤어짐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재회의 약속이 있는 까닭에 슬픔만은 아니었다. 영조의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였지만 다해를 가슴에 품었으니 당분간은 행복하리라.
집으로 돌아온 영조는 장난감 속에 파묻혀 어쩔 줄 몰라하며 기뻐했다. 노파도 영조가 이렇게 즐겁게 노는 것을 처음 본다며 덩달아 기뻐했다. 영실은 아직까지 바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의 재림 예수는 기다림만 강요하는 분이 아닐까? 천주님도 우리에는 기다림의 세월만 주셨으니 그분의 독생자도 아버지의 뜻을 따를 것 같았다. 내 생각 같아서는 천주님이나 재림 예수도 하루 종일 집안 일을 펭게쳐 버리는 신도를 어여삐 여길 것 같지는 않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이 신흥 종교집단에 현혹되어 집안을 떠날 것이 분명하다. 영실의 안중에서 우리 가족의 존재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었다.
다해는 영조와 약속한 대로 나를 빼돌리고 밖에서 단 둘이 몇 번을 더 만났다. 다해는 나를 사랑하듯 영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나와 영조를 통해서 그녀는 자신의 가족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다해의 존재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다해와 가까워진 영조는 영실이 줄 수 없는 사랑을 다해를 통해서 공급받고 있었다. 영조에게는 그것이 도리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엄마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야 할 나이에 노파의 손에서 자라던 영조. 불쌍하고 어린 녀석이 할머니의 사랑보다 훨씬 싱싱한 다해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영조의 복이었다. 다해의 꿈은 우리 가족으로 인해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영실을 잃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다해라는 선물이 배달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각자에게 주어진 행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익숙해질 만 하면 찾아드는 불행의 발자국. 불행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행복을 진심으로 누릴 수 없는 걱정이 싫은 것이다.
행복으로 달려가는 우리를 가로막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불경기로 술집은 문을 닫았고 아직도 직장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연락을 받게되어 눈앞이 캄캄했다. 내일에 대한 염려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런 소식은 참으로 암담한 것이었다. 우선은 비행기 표가 문제였고 영조를 맡아 키우는 노파에게 줄 돈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영실은 오래 전에 가정 살림을 버렸기 때문에 이번 일도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생각하다 못해 다해에게 문제를 털어놓았다. 다해는 나의 딱한 사정을 자신의 일로 알고 힘써서 해결해 주었다. 친구들한테 변제하여 비행기 표를 끊어주었고 영조도 틈나는 대로 찾아 보겠다며 걱정하지 말고 서울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노파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니 내가 직장을 구할 때까지는 무보수로 영조를 맡아서 키우겠다며 근심을 덜어 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주위에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으므로 표를 받아든 그날 밤 한국으로 떠났다. 코빼기도 볼 수 없는 영실에게 말도 못하고 모든 뒷일을 다해에게 부탁하고 떠난 것이다. 몇 년만의 귀국인가?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정년을 앞두고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시던 아버지가 눈앞에 어른 거. 거인이 할 일을 잃고 방황하다가 쓰러진 신세였다. 교장 선생이라기 보다는 동네의 어른으로 통하던 아버지가 자신의 훈장을 잃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가 누리던 권위를 한 순간에 잃고나서 지내셔야 했던 세월은 어쩌면 정해진 단계를 밟아 가는 몰락이었을 것이다. 지난번 환갑에도 찾아 뵙지 못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변변치 못한 꼴로 고향에 가야 한다니 답답하기만 하였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잊고 살아왔던 과거가 한 순간에 일어나 내 앞으로 달려와서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자식으로 태어나서 걱정만 끼쳐드리고 불효의 세월만 드린 장남. 영조를 낳았을 때 드렸던 전화가 내가 할 수 있는 효도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고향으로 내려갔을 때는 이미 어려운 일을 다 처리한 후였다. 동생이 내 손을 붙들고 눈물을 흘린다. 어머니는 통곡을 하시며 애꿎은 여동생을 붙들고 계셨다. 소복을 입은 젊은 아가씨가 어머니 곁에 하나 더 있었다. 시아주버니라는 호칭을 붙이며 그녀가 내게 와서 인사를 했다. 동생의 결혼 소식도 듣지 못한 형이라니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산소로 올라갔다. 선산 중턱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은 아버지의 산소. 어렸을 적 나와 동생을 데리고 자주 오르시던 그 곳에 아버지가 누워 계신 것이다. 이렇게 살다 가실 것을 가까이서 운명하시는 순간도 지켜보지 못한 불효 자식. 믿고 의지하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러 나왔다. 세상이 결국 다 그런 것인데. 무슨 개꿈을 꿨다고 이역만리 미국까지 굴러갔단 말인가? 비록 종교에 미쳐서 바깥 세상으로만 도는 아내지만 얼굴이라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렇게 보고 싶어하던 장손 영조를 아버지의 품에 안겨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아버지 한번 제대로 못 모시고 불귀의 객으로 보내야 했던 세월. 가슴이 찢어지고 다리의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참았던 감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현실의 자신도 그렇지만 장남으로 아버지를 모시지 못했던 불효의 채찍이 온몸을 찢고 있었다. 한참을 정신없이 울었다. 속에 있던 응어리와 한을 이렇게 라도 풀어야 했다. 서산에 걸린 태양이 나의 마음을 대신해서 쓸쓸하게 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삼십이 넘은 지금도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자신이 끝없이 못나 보인다. 나는 피끓는 절규로 아버지를 다시 불러본다. 아버지!
동생이 모든 일을 처리한 뒤라 내가 할 일은 고향에서 어머니의 마음을 달래는 것이 전부였다. 미국에 있는 영조와 다해 생각 때문에 어머니 곁에 있는 것도 편치 않았다. 가족과 함께 몇 일을 보낸 다음 미국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기다리는 것은 첩첩 산중의 고뇌와 암담한 내일뿐이지만 차라리 미국으로 돌아가서 불효에 대한 마땅한 고통을 받고 싶었다. 눈물로 옷소매를 적시며 말리시는 어머니를 뿌리치고 고향을 떠났다. 언제 다시 고향에 돌아올지 모르는 나그네 생활에서 미국은 제 2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일 주일 만에 돌아온 뉴욕. 악연으로 맺어진 이 곳이었지만 마음만은 편하였다. 살다보니 타향도 고향이 된 것이다. 영조가 보고 싶었다. 내게 남은 것은 영조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다해가 영조랑 놀고 있었다. 영조가 나를 발견하고 달려와 내 품에 안긴다. 영조의 말로는 다해가 매일 와서 자기와 놀아 줬다는 것이다. 틈나는 대로 아이를 찾겠다던 다해가 영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아 고마웠다.
한동안 소식이 없던 권이 내가 직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했다. 새로 옮긴 식당에 나를 추천하였으니 함께 일을 하자는 것이었다. 힘들 때마다 잊지않고 전화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목구멍에 거미줄 치기 전에 알아서 손을 써주는 권이 형제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슬픔이지만 발등의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에 권의 제의에 따르기로 했다. 다해는 정성으로 영조의 대리모 역할을 해 주었고 그런 다해의 진심을 알고있는 영조도 다해를 잘 따랐다. 변하지 않은 사람은 영실이밖에 없었다. 재림 예수교의 최면에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다해가 영조의 사랑을 받아가며 나의 사람이 되어가고 있을 때 밖으로만 돌던 영실이 집안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예상 밖의 일이었다. 재림 예수교의 주인공이 과연 재림이라도 한 것일까?
"영조 아빠! 얘기 좀 해요."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지?"
"예수님이 이 땅에 올 시간이 가까워졌어요. 세상일에 신경 쓰지 말고 준비하세요."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당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심판이 있을 테니까 준비하란 말이에요."
"어떻게 해야 심판을 면할 수 있단 말이요?"
"다해라는 여자와 관계를 정리하고 순결을 지켜야 해요."
"당신 지금 나한테 전도하는 거요? 아니면 설교하는 거요?"
"영조도 악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하니까 그 여자와 거리를 둬야 해요."
"악의 울타리?"
"다해라는 여자가 심상치 않아요. 악의 그늘이 짙게 깔린 영혼을 가지고 있거든요."
"당신이 바깥으로 도니까 그렇지. 집안에 쳐 박혀 있어 봐! 그런 다음에 할 말이 있으면 다시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나는 지금 중대한 사명 때문에 바깥으로 도는 거예요. 나를 박해하지 마세요. 박해한다고 해도 겁먹을 제가 아니니까요."
"박해?"
"그래요. 당신이 저를 박해한다 해도 저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어요."
"순교라?"
"당신이 알고 있는 한영실이 아니라 재림 예수를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로써 순교라도 감당할 자신이 있다구요."
"영규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려요!"
"가족도 유혹이 될 수 있어요. 당신 지금 내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후회?"
하나 마나한 대화였다. 영실은 나를 마귀의 추종자로 몰았고 나는 재림예수교 광신자 한영실과 좁힐 수 없는 이견이 있음을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영실이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다. 여자의 질투도 사라진지 오래된 것 같았다. 더 이상 영실에게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영조만 바라보며 식당 일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계속될 인연이 아닌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으로 서로가 족한 관계를 누렸을 지도 모른다.
영조와 나에게 있어서 다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내게 불타는 밤을 제공하고 영조에게 싱싱한 사랑을 공급하는 다해와 같은 사람을 세상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제는 네일 싸롱에서도 제대로 대우를 받을 정도로 기술을 익힌 그녀의 삶에 대한 적극성은 결혼 전의 영실을 보는 것 같았다. 사랑의 파도를 타고 세상에 내려왔을 때 다해가 지나는 말로 꿈 이야기를 했다.
"만규씨 기억나?"
"무슨 기억?"
"내 꿈 말이야."
"매일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
"크게 성공해서 서부로 이주하는 꿈 말이야."
"그건 그레이스의 꿈이었잖아?"
"아무려면 어때."
"나는 그레이스가 다해로 변한 다음에는 그 꿈을 버린 줄 알았지."
"이번에는 예감이 심상치 않아."
"왜?"
"생전 꿈에 보이지 않던 아버지가 나타났어."
"그게 어쨌다는 거야?"
"내게 죽을 고생을 여러 번 시켜서 미안하다고 하시지 뭐야."
"......"
"이번에는 부귀영화를 누리라면서 알 수 없는 번호 여섯 개를 주고 가셨어."
"내 생각으로는 개 꿈 같은데."
"그런 소리 마. 우리 아버지는 보통 분이 아니셨거든. 아무래도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아. 아버지가 그랬어 우리 아버지가 내가 불쌍하다고 말이야..."
"만에 하나 꿈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할 꺼야?"
"우리 모두 서부로 가는 거지 뭐! 만규씨랑 영조랑 한 가족이 되어서..."
"...."
"만규씨도 떠날 준비가 된거지?"
"이곳에서 살면 안될까?"
"영실씨가 있는데 어떻게?"
"지금같이 살면 되잖아!"
"그건 싫어. 우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새로 시작하는 맛이 없단 말이야."
"알았어. 어쨌든 개꿈이니까 흥분할 것은 없잖아."
"그런 소리하지마."
"알았다니까."
싱거운 소리다 싶어 우수께 소리로 넘겨버렸다. 다해의 집착도 영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신분의 상승을 위한 최단 거리의 꿈이 그녀를 쉽게 떠나려 하지 않았다.
권의 도움으로 다시 웨이터의 본업으로 돌아왔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직업이었다. 변변한 직업이 아닌데도 권이나 나나 그 테두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새로 개업한 식당인데도 장소가 외져서 그런지 손님들이 별로 붐비지 않았다. 가끔 계모임 같은 것이 있어서 그나마 밥술은 놓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람이 한가해 지면 별 생각이 다 들게 마련이다.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잡념도 없어지고 피곤하지도 않은데 할 일없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쉽게 피곤해지고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차라리 무슨 사건이라도 벌어졌으면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말이 씨앗이 된다고 하였나? 말 때문에 생긴 일인지 모르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20명 정도의 주부들 계모임이 점심 시간에 맞춰서 있었다. 한눈으로 보아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주부들의 자랑 모임 같았다. 한결같이 유럽의 초 호화 차를 몰고 온 아줌마들은 최고급의 옷에 비싼 보석을 몸에 바르고 식당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권이 오늘은 운수 대통이라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이 별실에 들어가서 음식을 먹기 시작한 지 채 30분도 지나기 전에 스무 살도 안되어 보이는 사내 녀석들 여섯이 총과 칼로 우리들을 위협하며 식당에 들어왔다. 놈들은 각자의 역할을 사전에 치밀하게 분담한 것 같았다. 한 놈은 문 앞에 서서 바깥을 감시하였고 권총을 가지고 있는 녀석 둘이 홀에 있는 종업원과 몇 명 안 되는 손님들과 권 그리고 나를 주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주방 사람들의 손을 차례로 묶게 하더니 결국 우리들도 꼼짝 못하게 붙들어 메었다. 흉기를 들고 들이닥친 데다가 어떻게 손을 쓸 여유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대항할 틈도 없었다. 두 명이 우리를 감시하는 동안 나머지 세 놈은 카운터의 현금을 몽땅 턴 후 별실로 들어갔다. 그 안에 있는 아줌마들이 반항을 하다가 쥐어 맞는지 간간이 비명소리도 흘러 나왔다. 반항을 하다가 그보다 더한 봉변을 당할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줌마들은 놈들이 시키는 데로 순순히 따라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보석상에 가서 금광을 캐듯 돈과 보석을 쓸고 나왔다. 계획을 해도 이렇게 치밀한 계획이 있을 수 없었다. 사전에 누군가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저지른 계획범이 분명하였다. 모임이 풍비 박산 났으니 팁이고 뭐고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부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두 손이 뒤로 묶인 것도 생각지 못하고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놈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그놈이 바닥으로 쓰러지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를 떠난 총알이 놈의 근처에 있던 권의 어깨를 관통했는지 권이 힘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준을 하고 당긴 것이 아니지만 재수 없게 권이 맞은 것이다. 뒷생각을 못하고 저지른 행동에 재수 없게 권만 당한 꼴이 되었다. 여태까지 침착하게 일을 진행하던 놈들이 순식간에 우왕좌왕 하며 밖으로 몰려 나갔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속력으로 차를 몰고 도망쳤다. 별실에 있던 아줌마 가운데 하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경찰에 연락을 했다. 곧이어 경찰과 구급차가 달려왔다. 다행히 권의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지는 않았다. 관통한 것으로 알았던 총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중상은 아니었지만 고통스러워하는 권의 얼굴을 쳐다보니 미안했다. 엠브란스에 실려가는 권에게 한마디한다.
"미안하게 되었군..."
"......"
"그래도 다행이야. 총알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더라면..."
"아, 괜찮아.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겼으니까 앞으로는 장수하겠지."
"그래! 액땜을 했다고 생각하게."
"미리 알고 쳐들어 왔겠지?"
"누군가 정보를 알고 있었을 것 같아."
"그렇겠지?"
"물론이지."
권은 차에 실려 병원으로 이송되는 그 순간까지 나와 대화를 이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10만 불 짜리 계모임에 보석류의 피해액을 합하면 이번 6인조 강도가 턴 돈은 족히 30만 불이 넘는다는 것이다. 젊은 놈들이 대담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경찰들의 대화 가운데 한국 아이가 관계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행이 아니라 상습범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된 신종수법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미국까지 와서 강도짓을 하는 아들놈을 둔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뒤죽박죽 되어 가는 세상 꼴이 불길한 조짐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영실이 말대로 천주님이 노하셔서 재림 예수를 이 땅에 다시 보내는 것은 아닐까? 밤에 다해를 만나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니 나보다 훨씬 놀란 반응을 보였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몸 구석구석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공연한 이야기로 다해를 놀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해는 자신이 겪은 일보다 더 안타까워하며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썼다.
"만규씨! 조금만 참아. 이번에는 확실한 예감이 들거든."
"뭐가?"
"꿈 말이야. 개 꿈같지는 않다니까."
"다해는 집착이 대단한 ...."
"그러면 안돼? 새 가족을 얻었으니까 그 다음은 꿈일 것 같아. 나는 그것이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해. 내 꿈이 너무 황당하다고 그러지 말아. 그래도 꿈인데 뭐!"
"그러면 잘 해봐!"
다해와 나는 꿈 이야기를 마치고 한 몸이 되었다. 익숙한 습관처럼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천국에 다녀왔다. 세상의 고뇌에 번민이 손쓰지 못하는 진짜 천국에.
육인조 청년 강도로 평판이 나빠진 식당이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나마 어렵게 구한 식당 일이었지만 집에서 편히 쉬어야 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이런 불행과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마치 불행이 어떤 패턴을 가지고 내 앞에서 나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이 패턴대로 한영실이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영실이라는 존재는 우리 가정에서 동거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호주로서의 내 의무는 그녀가 바깥 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잠자리를 제공하면 그만 이었다. 우리 사이에 부부관계는 오래 전에 끝났기 때문에 서로를 갈망하는 일은 없었다. 재림 예수교에 빠져있는 영실은 오래 전에 그녀가 꿈꿨던 미국이라는 천국을 지금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천국 입성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을 초월한 비장함이었다. 바깥으로 돌며 전도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녀가 그 일도 멈추고 집으로 들어왔다. 옷가지를 정리해서 기도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제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고 기도로 휴거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다. 지금 산에 올라가면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루 이틀 만에 기어 들어오는 집이지만 그래도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영조에게 그녀의 기도원 행은 마지막을 뜻하는 것이었다. 오래 전 사랑의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맞춘 영조에게는 다해가 보다 현실적이었는지 모른다. 아이에게 본능적인 사랑을 공급하는 다해가 생모보다 영조에게 더 필요한 것이었다. 다해는 영조에게 좋은 아줌마 이상의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실이 기도원으로 올라간 지도 벌써 열흘이 더 되었다. 재림 예수의 손을 잡고 하늘에 오르겠다는 그녀의 믿음에는 산 아래의 일들이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영실이 산으로 들어간 후로는 다해가 매일 집에 들러 저녁 준비를 해줬기 때문에 더 이상 노파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가을의 쾌청함과 푸름을 선사하고 있었다. 늦더위로 간밤을 설치게 했던 몇 칠 전의 날씨와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식당 일을 그만둔 나는 집에서 영조와 한가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녘의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영조에게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을 때 다해가 전화를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고 누군가에 쫓기는 다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만규씨? 마침 집에 있었네. 나 지금 케네디 공항에 있으니까 영조랑 빨리 나와!"
"갑자기 공항은 왜?"
"시간이 없어! 설명은 만나서 해 줄 테니까 D항공 대합실로 나오면 돼!"
"아닌 무슨 일이야?"
"나오면 다 알게 되니까 빨리!"
"......"
내게 생각할 여유도 주지 않고 다해가 전화를 먼저 끊었다. 난데없이 공항으로 나오라는 다해의 전화가 무슨 사고 때문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서울에서 무슨 연락이와서 급히 출국하는 것은 아닐까? 갖가지 추측을 하며 다해가 기다리고 있는 케네디 공항으로 차를 몰았다. 공항 입구에서 D항공 대합실 출구로 차가 빠져나오자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다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한 눈으로 봐서도 서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차를 파킹랏에 세워둔 다음 영조를 등에 업고 뛰었다. 다해는 영조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한 다음 나를 끌다시피 하여 40번 게이트로 가자고 졸랐다.
"20분 후에 떠나니까 서둘러서 가야해!"
"무슨 일 있는 거야?"
"설명은 나중에 하고.... 빨리 가야지 잘 못하다가는 놓친단 말이야."
"알았어."
나는 영조를 다시 등에 엎고 40번 게이트를 향해서 뛰기 시작했다. 다해는 빠른 걸음으로 내 뒤를 쫓아오면서 게이트의 방향을 가리켰다.
"만규씨 저쪽이야!"
"O-K-"
게이트에 도착해서 티켓팅을 마치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승무원들이 비행기 문을 닫기 시작했다. 좌석은 만원이 아니었지만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다해가 미리 예약한 자리에 갔다. 원형 창문 옆으로 좌석 세 개가 나란히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지 채 5분도 안돼서 거대한 동체의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다해가 입을 열었다.
"Just made it!"
"갑자기 무슨 일이야?"
"산호세에 가는 거야."
"거긴 왜?"
"살러 가는 거지 뭐!"
"미리 이야기 해 주지 않고?"
"아무려면 어때... 그나저나 First Class로 여행하는 기분이 어때?"
"혹시?"
다해는 하얀 이를 보이며 웃음으로 대신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겨 오랫동안 지금의 행복을 간직하려는 것 같았다.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다해가 백에서 복권 한 장을 꺼내어 내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이거야!"
"진짜야?"
"물론이지!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는 걸!"
"하-하-하-"
"하-하-하-"
우리의 웃음소리가 비행기 안에서 사라질 줄 모르고 메아리 치는 것 같았다. 원형의 창문을 통해서 바깥 세상을 내려다보니 두꺼운 구름이 몇 겹의 층을 이뤄 비행기 아래에 깔려있었다. 하늘 위에서 천국을 생각하니 갑자기 영실의 재림 예수가 궁금해진다. 다해의 손을 잡고 있을 때 영실이 모습이 떠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일 곱.
산호세에 자리 잡은 우리는 지금 식당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종업원으로 일생을 누렸던 내가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 신기했다.새 엄마 밑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영조는 언젠가 낙원의 제왕이 될 것이다. 다해의 지상 천국은 이루어지고 있는데 영실의 천국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지금쯤 그녀 또한 재림 예수를 만나 하늘로 들리움을 받은 것이 아닐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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