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폐업선언

하 나.

11월이 끝을 보이는 바로 그 때부터 형규의 나날은 갈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기 시작했다. 8년을 몸담아 왔던 사업을 정리하려니 가슴이 답답해지고 앞이 깜깜하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무슨 준비라도 하였다면 손을 털고 나오는 일이 지금처럼 막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특별한 재주 하나 없이 벼랑 끝에 서게되니 마냥 불안하기만 하였다. 아직도 삼십대의 나이라면 어떤 일이라도 어려움 없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만 관념과 지식의 동산에서 뛰놀던 그로써는 세상에 선전포고를 하고 무슨 도전이라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늦게 나마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한국 신문도 열심히 읽었다.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작정 기다리기보다는 생산성 있는 일거리를 찾은 셈이다. 어느 신문사 사고에 기자모집 이라는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글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글쓰는 작업을 꺼려왔던 형규는 모처럼 꿈속에서 그리던 애인이라도 만난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는 주저 않고 이력서와 자기 소개서를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찾고 어떤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은 일상의 시간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야속할 정도로 빨리 흘러가던 시간이 갑자기 멈추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미국으로 건너온 8년 세월이 형규를 여러 번 멍들게 하였지만 그렇다고 암흑의 나날로 점철된 것만은 아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의 장도를 떠날 때, 그는 누가 보아도 보장된 미래를 향해 발길을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뉴욕의 회색도시가 거인으로 변하여 형규를 위축시키려 해도 가끔씩 오기를 부리며 언제나 오뚝이처럼 일어서던 형규. 그러나 불황의 늪에서 경제적 구조의 손길도 없이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침내 경기침체의 벼랑 끝에서 뛰어 내려야 했다. 형규는 그 동안 끌고 온 사업을 정리하면서 '페업선언'을 하였다. 친지들 앞에서 실패의 변을 털어놓은 것이다.

폐업선언 - 그래도 멈추지 않는 삶 -
먼길을 가다가 돌 뿌리에 채어
코가 깨질 때 그대로 주저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 그곳 푸른 하늘 위에는 하얀 구름의 꿈이 있거든요
코끝이 아리고 선홍의 피가 흘러도
이런 말로 대신 하며 일어나 걸어가리.
열심히 살다가 재수라는 덫에 걸려
휘청거릴 지라도 쉬지 않고 뛰어가리.
우리의 앞길에는
보이지 않는 멈추지 않는 삶이 있기에 ....

모여든 사람들마다 형규의 앞날을 걱정하는 데도 그는 도리어 사람들을 위로하면서 자신의 말 한마디로 그들을 달래고 있었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삶이 있기에...'어찌 보면 궁색한 변명을 하는 것 보다 누구의 말대로 '...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진리를 파악한 형규가 든든해 보였다. 그날 형규는 술독에 빠질 정도로 진탕 퍼 마셨다. 아무리 숨기려해도 허탈한 심정까지 억제하지는 못했던 까닭에 친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형규는 술만 퍼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하면서도 주문처럼 그의 마지막 시구를 뇌까렸다. 마치 염불을 외우듯 하는 그의 행동이 그에게 남은 최후의 위안인지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형규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던 형규는 우리들 사이에서 해결사로 통하였다. 가끔씩은 독설을 하면서도 그 결과를 보면 형규의 의도대로 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형규는 일그러졌던 친구의 얼굴을 다리미로 펴는 것보다 말끔하게 풀어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능력도 있는 편이라 남들보다 한 두발은 앞서가던 녀석이었다. 하기야 그런 이유로 미국도 남들보다 먼저 건너온 것이 아닌가. 형규의 폐업 선언은 본인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사기 저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형규가 내게 연락을 한 것은 페업선언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 잠자리에 들어가려 할 때 난데없이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실수를 상대방에게 보이지 않는 그가 그날 따라 혀가 풀린 소리로 나를 불러내고 있었다. 아내에게 형규의 연락을 받고 나간다고 하니 그녀마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정도였다. 영국신사인 형규가 밤늦은 시간에 나를 찾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은지 아내가 걱정을 했다. 나는 그가 기다리고 있는 술집으로 달려갔다. 구석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형규가 나를 보고 손짓을 하였다. 그의 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나는 그의 앞으로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형규는 나의 술잔에 양주를 부으며 마시자고 하였다. 입술을 축이고 잔을 내려놓자 형규는 나를 상대로 속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서울을 떠날 때의 일이 엊그제 같더니 어느새 8년이 흘렀어. 지금 또 다른 한 해를 붙들고 있는 세월. 8년전 그 해에 나는 어땠지? 갑자기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고 싶구나. 85년 8월 25일에 코스모스 졸업을 했지. 숱한 방황을 마치고 동기들 보다 먼저 대학 문을 빠져 나올 때 내가 생각했던 미래는 지금의 현실이 아니었어. 눈에 보이는 것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실현 가능한 계획을 세우고 유학 길에 오른 것 같아. 졸업의 순간이 시간을 정리하며 선을 긋고 있을 때 나는 그 과정을 몇 번인가 넘겼지. 그런데 지금 또 한번의 졸업을 해야 할 것 같아. 지금의 심정을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모든 색의 물감을 한꺼번에 섞어서 검정 색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혼자서는 견디기 힘들어서 너를 불렀어."
나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형규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형규의 넋두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내 생각보다는 그의 말을 듣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았다.
"연기로 사라질 인생. 집착 때문인지 자꾸 붙잡으려 하니까 더 힘이 드는가 봐. 한번 들어볼래? 네가 나오기 전에 몇 자 적어봤어.



벌써 오래 전의 일이라
생생한 기억은 없다
술상 차린 그날
벗들과 함께 꿈으로 가득한 미래를
침튀기며 그려갔던
바로 그날부터
현실의 날카로운 손톱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이 취하여 주절거리면서
웃음을 날렸던 그 순간이
아직도 어렴풋이 연기처럼 어른거린다.
지금까지 나는 연기 속을 헤매지는 않았을까
눈앞에 다가온 차가운 현실이
나를 피해가지도 못하게 한다.

바람만 훅 불면
꺼져버릴 지나간 記憶
세월 지난 지금 안타까움으로 그것들을 붙잡으려 애쓴다.
담배 연기로 허공에 사라질 지나간 꿈같은 세월.
서글픔이 텅 빈 가슴을 대신하여 하루를 걷어가 버린다.
가을에 낙엽 타는 냄새로 나의 과거도 태워버리리.
서울서 만든 모든 기억들이 낯선 땅에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도망친다.
연기로 사라질 나의 인생.

나는 형규의 낭송이 끝나고 나서 더 이상 그의 말만 듣고 있을 수 없다는 직감을 느꼈다. 사업 때문에 글쓰기가 두렵다던 그로부터 세상의 끝에 서있는 암울한 소리를 듣고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들어가 어둠 속에서 빛의 터널을 보여 줘야했다.
"형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서 썰렁한데 이래서야 천하의 강형규라고 할 수 있겠어?"
"하나 더 써놓았지. 서울을 떠날 때의 감격을 되살리면서 말이야. '탈출기'라고 이름을 달았으니까 분위기도 괜찮을 것 같아. 나중에 속을 털어놓을 테니까 지금은 내 기분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네가 없으면 당장에 미쳐버릴지도 몰라.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막막하거든. '탈출기' 어때? 서울을 빠져 나오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 같거든.

脫出記
마침내 떠나게 된다.
앞으로 열릴 불확실한 시간을 준비 없이 맞는 지금 나를 스쳐간 과거는 더 이상 묻지 않으리라.
오늘이 가면 헐떡이며 쫓아야할 숱한 것들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서울을 빠져나가기 전에 쉬운 생각을 힘겹게 긁어모으리니 세월아 훗날에 나의 탈출기를 네게 살짝 비출 때 기억한다 적어다오.

8년 전의 일 치고는 너무나 생생해서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였어. 그때의 일들이 새삼스러웠거든. 더군다나 신주처럼 모시던 가게를 정리하는 입장에서 나는 완전한 패배를 인정해야 하거든."
형규의 마지막 말이 쇠망치같이 내 머리를 세차게 내리치고 있었다. 가게를 정리해야만 하는 그의 심정이 어떤 것인지 이제야 짐작이 가능했다. 여간해서는 속마음을 내 보이지 않는 그가 늦은 시간에 나를 불러내어 술을 청할 때 어느 정도의 일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밥줄 문제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슨 말로 형규를 위로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나는 갈증을 느껴 형규가 권하는 양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형규는 나의 행동을 지켜보고 나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지금 누군가를 위해 기억제를 올리는 그 순간
情의 교화 술로 나눈 생각들과 사랑만이 나를 쫓아 먼길 떠나리.
그리하여 오늘 너희들로 되살아 나도다.
걱정할 것 없어. 인생에 성공만 있다면 재미없는 일 아니겠어? 때때로 실패도 하면서 한 걸음씩 전진하는 법이라고. 일 주일 후에 문을 닫을 예정이야. 그래도 한 사람쯤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너를 부르게 된 거야. 이렇게 나와줘서 정말 고맙다. 오늘은 내 술친구 좀 되어 주지 않겠니?"
"술이야 마시겠지만 내가 뭐라도 도울 일은 없을까?"
"차차 생각해 보면 무슨 궁리가 생기겠지. 산 입에 거미줄 치는 법은 없으니까..."
"모두들 불경기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지 몰랐어. 나같이 공부만 하는 사람에게는 강 건너 불구경정도로 생각했거든. 남들의 불똥이 너한테까지 튀리라고는 예상을 못했는데 막상 네 말을 듣고 나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겠구나."
"억지로 끌고 가려면 갈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번만큼은 삶의 새로운 전기로 삼고 싶었을 뿐이야. 손님들하고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그렇고 집주인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이제는 지겹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도 젊을 때 수를 써야지 그렇지 않고 이렇게끌려 다니기만 하다가 대책 없이 늙어 버리면 그때 누구를 원망하겠어?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상황이 도리어 결단을 내리기 쉬웠어."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만 네 뜻대로 되었으면 싶다. 너라면 무슨 일을 시작해도 금방 두각을 나타낼 꺼야.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동안 못썼던 글이라도 쓰면서 준비하도록 해라.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형규 너는 사업보다는 문학을 택했어야 했어. 네 재능을 살렸다면 오래 전에 문단에서 이름을 날렸을 꺼야. 이 기회에 내가 하는 말도 염두에 두고 앞을 결정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글은 아무나 쓰는 줄 아니? 그릇이 있는 법이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 형규 네가 못하면 도대체 누가 글을 쓰겠냐?"
"...... 술이나 마시자. 지금 이 시간만은 단순해지고 싶어."
나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못하고 술잔을 다시 비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형규는 눈빛이 불타는 것 같은 광채를 내면서 한 마디를 더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요구에 응하기라도 하듯 한 수의 시를 읊어가고 있었다.
"여름이 끝날 무렵 허름한 옷차림으로 쉬어가자던 이 땅에서
팔 년의 緣을 맺어 다른 세월로 살아온 시간.
기억제를 뒤로하고 믿음으로 보냈던 파고의 고저에서 이제는 뛰어 내릴 순간.
서글픔으로 뒤범벅된 그 시간과 영영 작별할 지금 벙어리의 말 놀림으로 한 시대를 접는다."
형규는 어둠 속에서 눈빛을 번득이며 그의 시 정신을 비추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몰락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문학세계가 활짝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보다 5년이나 먼저 미국으로 건너온 형규는 우리들 사이에서는 개척자로 통하였다. 남들이 꺼려하는 일이나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들을 마치 시범이라도 보이듯 앞장서서 건드리는 것이 그의 독특한 기질이었다. 남들이 모르는 그의 속마음을 형규는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다.
" 1985년 9월 1일.비행기에 몸을 싣고 정말 난감하게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나 자신은 과연 무엇일까?나의 탈출은 잘 짜여진 계획의 일정도 아니요, 돌아올 날짜를 정하고 떠나는 관광여행도 아님을 불쾌한 예감으로도 느낄 수 있다. 지금의 탈출이 현실 도피를 위한 시간여행은 아닐까? 대학의 온실에서 벗어나 냉혹한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짜릿한 대결마저 외면한 채 막연히 스물 다섯 해나 지켜왔던 나의 공간을 떠나야하는 순간. 기억과 시간의 그림을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당면 성조차 한마디로 찾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구나. 학문을 위해 보다 넓은 세상과 대면하려고 떠난다는 미명으로 아메리카는 나를 환상의 손길로 유혹하고 있었다. 논리적이지도 않은 젊은 피. 그리하여 처음부터 부조리를 잉태한 변형된 삶을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관심. 무인식. 무감각. 무목표... 어찌 보면 이런 양상의 무(無)상태가 직접적인 동기였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나의 탈출기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지극히 관념적인 탈출. 내 주위에서 정으로 감쌓아 주던 너희들도 모르고 있었던 의식의 흐름을 한번 훑어보자. 난생 처음으로 비행체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나는 기분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쾌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연민으로 온몸이 젖어가고 있다. 한 벗으로부터 전해 받은 음악 테이프에 귀를 기울이며 표적 없이 치닫는 어떤 생각들. 온갖 잡념이 집중을 방해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고자 하는데도 그 결과는 언제나 시원치 않은 찌꺼기 더미. 확실하지 않은 미래를 준비하기에는 너무나 무책임한 마음가짐. 홀연히 벗어나 자신을 돌아보니 이것이야말로 세상에 던져진 물체가 느끼는 필연적 고독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이제는 외부와 단절된 고립 속에서 고독을 붙들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과 내가 모르는 어떤 이벤트 사이에 항상 초점이 되어왔던 그런 삶으로부터의 격리.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내 생활상이라는 예감이 든다. 좌우간 불안하다. 불확실한 시간이 펼쳐질 것 같기에....
귓가에 맴돌던 허망한 소리들 고막을 무겁게 누르며 독한 쇠맛을 풍기며 속절없이 달려온다.
이제 잠을 깨어라. 현실은 너무도 냉혹한 하루하루의 連續
모질지 못한 성격에서 쉽게 자라온 나태가 이제는 성격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암흑. 서울 상공을 몇 번인가 맴돌고 나서 그 잔영을 완전히 지우려는 듯 비행기는 하늘 끝으로 머리를 내밀어 높게높게 날아가고 있다. 그나마 점으로 확인되었던 물체들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흰 구름과 푸른 하늘. 비행기의 동그란 창을 통해 내려다본 구름. 지상에서 올려다 볼 때는 만질 수 없다는 체념으로 관심 밖의 것이었던 구름이 너무나 가깝게 눈앞에 다가와 속삭이고 있다. 두꺼운 층을 형성하여 그 끝이 안보일 정도로 길게 펼쳐진 구름바다. 그리고 다른 세상의 푸른 하늘. 구름 저 편에 별개의 세계가 있으리라는 고운 마음이 허망의 현실로 판명되어도 구름 위의 하늘은 변함없는 일정을 유지하고 있다. 소인의 회의적 사고로 인해 세상은 태초의 원형을 잃어가는 지도 모른다.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온다. 더 이상의 집착은 버려야할 것 같다." 비행기에서 써 보내었던 형규의 첫 교신은 우리들이 납득하기 힘든 쓸쓸함뿐이었다. 형규의 웃음 이면에 있었던 남모르는 비애가 그 순간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젊은 형규와는 판이하게 다른 선전포고였다.
나는 형규와 더불어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술이 센 편은 아니었지만 형규를 지켜야한다는 본능이 나를 깨어있게 하는 것 같았다. 정신적으로 우리들 사이에서 리더로 통하였던 형규의 나약함이 바깥으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그를 붙들어 제자리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날 밤 결국 형규는 흠뻑 취해버렸다. 마치 술독에 빠져 익사를 희망하는 알콜 중독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영웅 강형규의 몰락이 젊음의 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의 우상이 신의 분노로 파괴되는 것은 아닐까? 천재성을 발휘하지 않은 인간의나태함에 조물주가 노여움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형규에게 무슨 변화가 있지 않으면안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일주일 후 '폐업선언'으로 다시 한번 정신을 잃을 만큼 폭음을 하게된다.




둘.

"전기 대학의 문턱 높은 경쟁에서 두 번이나 실패한 후 그는 전형적인 현실 참여를 위해 자신의 동경을 부수고 세상을 향한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적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이후로 먹물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의 선택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땀흘려 만든 돈. 머리를 굴려 번 것이 아니라 몸으로 뛰면서 나름의 영역을 확대해야 하는 것이 그의 당면과제였다. K는 변변하지 않은 대학진학을 단념하고 호텔 경영 전문대학이라는 새로운 진로를 정하였다. 호텔 경영?전문대학의 학벌로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기가 극히 어려운 현실 속에서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무리가 있었다. 돈 보따리나 외국 유학에서 얻은 학위를 바탕으로 그 승진을 보장받는, 구조적으로 빈틈없는 조직인 까닭에 K의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어떤 환상에 사로잡혀 전문대학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몸으로 떼운다는 현실 감각으로 밑바닥에서 그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k는 고등학교 시절에도 다른 면이 있었다고 기억된다. 담임 선생으로부터 체벌을 받거나 경우에 벗어나는 대우를 받더라도 그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도리어 체벌로 인해 가해지는 고통을 어떤 쾌감으로 느꼈던 것 같다. 땀과 아픔. 어느 정도의 모멸감. 이런 것들이 밑바닥을 마다 않는 근성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문대 2년의 세월은 죽어 가는 시간들이었다. 어차피 다른 길로 떠난다면 의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도 공연히 잡념에 빠지는 순간 헤어날 수 없이 허우적거리다가 급기야는 술독에 빠지는 생활로 세월을 죽여갔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호텔의 분위기를 일찍부터 체험해 보자는 생각으로 벨멘 노릇도 해 보았다. 우수꽝스러운 서양의 제복과 원통모자에서 획일화된 인간상을 찾는다. 군대와 다를 바 없는 명령체계. 외국 손님이 오면 도어맨이 시키는 대로 짐을 들고 방까지 안내한다. 동냥을 바라는 거지의 심정으로 알량한 팁을 받은 다음 머리를 깊숙이 숙여야하는 직업. 그런 것들이 호텔 경영에 필요한 기본적인 서비스였다. 어느 날...." 형규가 보내준 글의 일부였다. 소설을 쓴다고 하면서 내게 카피를 보내 준 것이다. 형규의 글재주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詩를 쓰는 녀석이 또 한번 외도를 하는 것 같아 입이 씁쓸했다. 가게를 정리한 후 칩거생활에 들어간 그가 외부와 교신을 끊고 몰두하는 이유가 소설을 위함이었다고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제 길로 들어선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소설을 택한 것에 의문이 갔다. 나는 형규가 자신의 재주를 다른 면에서 발휘해 보고 싶은 집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꾸 험한 길을 택해서 떠나려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내 염려를 전하고 싶었지만 잘못해서 다시 움트기 시작한 글쓰는 의욕마저 빼앗아 버릴 것 같아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나는 생각다 못해 형규에게 연락을 하였다. 친구라고 하면서 친구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면 그에게 거짓으로 대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는 생각에 형규를 불러낸 것이다. 나는 약속 장소에 먼저 나가서 형규를 기다렸다. 그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궁리도 할 겸 그리고 먼저 나와 기다리는 것이 그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형규는 정각이 되어 약속 장소로 나왔다. 약간 초췌한 몰골이었지만 눈빛은 전보다 눈부신 광채를 띠고 있었다. 나는 형규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규 여기!"
"일찍 나와 있었구나. 그래 무슨 일로?"
"급할 것 없으니까 저녁이나 먹으면서 술 한잔 걸치자고...."
"유학생이 무슨 형편 풀렸다고 선심을 쓰려고 그래. 술은 내가 사지."
나는 형규가 주문할 때를 기다렸다가 조금은 성급하게 대화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글쓰는 일은 잘 되어가겠지?"
"너무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그것도 힘이 들어."
"지난번에 보낸 소설의 서두로 봐서는 녹슬지 않은 것 같던데."
"연막 전술이었어. 소설을 쓰려고 하니까 앞이 탁 막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너한테 먼저 보내서 의사를 타진해 본 거야. 아무래도 한 분야에 전념해야 할 것 같아."
"그러면 詩와 씨름을 하겠다는 생각인가 보군."
"그럴 작정인데 머릿속이 복잡해서 영 말이 빠져 나오지 않아."
"그렇다면 이제 할 말도 없을 것 같군 그래."
"무슨 뜻이지?"
"나는 네가 소설로 한판 승부를 거는 줄 알고 걱정을 했어. 형규하면 詩人이라고 믿어왔는데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하니 재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고맙구나. 그래서 너한테 슬쩍 보낸 것 아니겠어?"
"참, 기자 채용 건은 어떻게 되어가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쪽에서 무슨 연락을 해 주겠지. 원서 마감을 한지 이틀밖에 안 되었으니까 늦어도 다음 주말까지는 어떤 연락이라도 올 꺼야."
"네 적성에도 맞는 것 같으니까 그쪽으로 풀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실력발휘도 할 수 있을 텐데...."
"어떻게 되겠지. 목멜 정도로 다급한 것은 아니니까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 덕분에 휴식도 즐기고 생각도 정리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어?"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려 보는 것도 좋겠구나."
"내 염려는 그만하고 공부는 잘 되어 가겠지?"
"꾸준하게 해 나갈 뿐이다. 공부야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 아니겠어?"
"머리도 식힐 겸 오늘 우리 한번 마셔보자. 이렇게 해서라도 응어리를 풀어버릴 수 있다면 행복한 일 아니겠어?"
형규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한번의 실패로 주저앉을 그가 아니라는 걸 믿었지만 내가 우려했던 걱정이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형규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분명히 내가 자의적으로 만들어왔던 형규보다 훨씬 강한 인간이었다. 나는 왠지 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약함을 보인 것은 그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형규의 성공은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나의 희망이며 대리만족 일지도 모른다.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정해진 공간 안에 안주하기 십상이므로 모험을 한다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도전하는 일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제 삼자를 통해서만 변해 가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그래서 형규의 성공은 널려있는 현상을 이름짓는 구획정리일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친구들의 시험적 표본이 되어버린 것이다. 형규는 술잔을 권하면서 나의 잡념을 흩어 놓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술이나 마셔. 이 친구야!"
"그래. 한 잔 걸쳐야 詩仙의 노래도 들을 수 있겠지?"
"그만하면 술값은 되었으니까 빈말은 안 해도 되."
"무슨 소리! 학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봤어? 별다른 재주는 없지만 거짓으로 살지는 않는다. 이 친구야."
"자존심은 여전하군.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거야?"
"도전해온 쪽은 자네라는 걸 잊지마."
"도전? 그거 의미심장한 말인 것 같군. 우리 사이에도 그런 경쟁심이 있었던가?"
"말꼬리를 물고 있는걸 보니 옛날 형규를 발견하는 것 같군. 기분 나쁘지는 않은데."
"형규의 옛날?"
"그렇지. 빛나는 눈동자의 시인.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산적 두목 형규."
"산적 두목까지?"
"찾아내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여기서 그만하고 시나 한 수 읊어주는 게 어때?"
"듣고자하는 자세가 안되어 있군 그래. 의욕이 지나치다보면 협박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더 이상 고집을 부린다면 터질 것 같으니까 울며 겨자 한번 먹어보련다.

공갈
누군가 흉기를 들이대면 부화가 나서라도 몸부림을 치지만 서슬 시퍼런 협잡꾼의 혀끝이 공갈을 치려면 도살장 앞 黃牛의 신세.
- 기왕에 치려면 단숨에 목을 끊어주오.
이 구석 저 구석 꾹꾹 찌르지 말고 아픔 없이 한번에 내리치소.
겁먹은 눈망울로 애걸하며 매달려도 백정의 손끝은 비열한 웃음소리 허공으로 넘나들던 춤사위 몽둥이가 휙하니 지나가서 내리칠 때 세상 끝.
공갈은 다른 놈을 찾아 눈을 돌린다. "

"너무하군.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아 섬뜩할 정도란 말이야."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어. 다만 고집부리지 말라는 경계쯤으로 생각하면 되니까 말이야."
"그만하면 받아들일 만 하군. 그래도 자네의 혀끝에 이끼가 끼지 않은 것 같아 나로서도 흔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고. 형규! 고생을 하더라도 글쓰는 일만은 단념하지 말게나."
"자네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니까 무책임하게 권하지는 말게나. 그러다가 한번 더 쏘이고 괴로워하지 말란 말일세. 자네의 말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형규! 걸신들릴 정도가 되려면 단순함도 필요한 것일세. 복잡하게 생각 말고 받아 들일 수 있는데 까지만 取해서 자네의 것으로 만들면 그만 아닌가? 그리고 누군가 작심해서 쓴 소리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그 소리 언제 들을 수 있겠어? 오래 전에 자네가 한 그 짓거리를 지금 내가 대신하고 있는 것뿐이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섭섭할 리 있겠어? 네 뜻을 이해하고 있는데...."
형규는 나의 말을 씹어가면서 어렵게 여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글쓰는 사람들 고유의 자존심과 맞물려 심적 고통을 처리하느라 힘들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팽개쳐버렸던 의무감 같은 것을 발견한 듯 두 주먹을 쥐고 새롭게 일어서려는 느낌을 전해 받을 수 있었다. 형규에게 있어서 글은 공기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일상적으로 호흡을 하면서도 항상 잊고 지내는 공기. 그러나 몇 분이라도 호흡을 중지해 버리면 숨을 앗아가 버리는 생명의 근원.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갈 수는 있어도 글을 떠나서는 형규의 존재가치는 단번에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지금 형규의 몸부림을 목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생동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형규의 생각 그것이 詩라는 옷을 입고 세상 나들이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형규는 술을 몇 잔 더 비워갔다. 지난번과 달리 그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술을 마셔가고 있는 것이었다. 간간이 흘려보내는 생각들. 형규는 촉촉한 목소리로 가슴을 연다.

그 끝까지 끌어안으리.
구겨진 삶이라 하여 함부러 내버리지 마소
멋대로 써 갈긴 지난 세월로 그대 다시 살아나리니 싫다 타박마오.
한줌 흙이라 하여 마구 흩어놓지 마소
인생 끝 날에 영겁의 세월로 그대 다시 돌아가리니 싫다 거부마오.
시간 나들이 모두 다 하나 같기에
노동의 마지막날 그때 가서 눈감을 그날 가슴으로 끌어안으리
그 끝까지 끌어안으리.

형규의 언어가 춤을 추고 있었다. 이름을 짓자하면 自由舞가 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그의 語句. 나는 암흑 속에서 꿈틀거리는 형규의 몸놀림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삶보다는 내가 걸어야할 학문의 세계가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형규에게는 내가 염려할 하등의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래 전에 스스로 서 있었듯이 내 앞에 우뚝 서있는 장승과 다름이 없었다. 형규는 詩世界의 자랑스러운 시민이라는 진리를 깨우쳐가고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市民權을 획득한 자유로운 詩人이었다. 형규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자 계획하고 나온 만남이 도리어 나의 삶에 대한 초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형규는 마침내 그가 원하던 바를 되찾게 되었지만 나는 왠지 의미를 잃어버린 허탈함에 마음 한구석이 텅 빈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형규의 삶에 대한 일대 轉機가 내게는 풀 수 없는 과제로 쌓여 가는 것 같았다. 술잔을 빠른 속도로 비워가고 있는 쪽은 바로 나였다.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목이 말라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형규의 '폐업선언' 이후 그의 삶은 제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사업이라는 거인과 싸우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했던 형규가 이제는 자신의 행복을 돌아보며 살게 된 것이다. '폐업선언'이 행복의 개업선언이 된 셈이다. 나는 혼자말로 주절거리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도리어 잘된 일이었어!"
"느닷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난번에 있었던 네 '폐업선언' 말이야."
"악몽 같은 일을 왜 또 떠올리려 하는지 모르겠군."
"너에게는 흉터로 남을는지 모르지만 피하면서 살 수 없을 꺼야. 그리고 잘한 일이니 악몽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될 꺼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네 말대로 질질 끌려 다녔을지도 모를 일 아니야?"
"현실이라고 넘겨버리려 했어. 경제력을 상실한 가장이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준비 기간인데 어때? 곧 어디로든 복귀할텐데 뭐!"
"그래. 심각해지는 것보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쪽이 건강에 좋겠지. 네 말에 반기는 들지 않겠어."
"정신없이 달려왔으니까 중간 지점에서 쉬어간다고 생각해. 그래야 여유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야?""하기야 지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않겠어. 그러나 여유를 찾을 만큼 내 마음이 한가롭지는 않아. 도리어 신경이 날카로운걸 자주 느끼거든."
"공부 속에 파묻혀 있으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야.산 속으로 들어가다가 길을 잃은 느낌이라고 할까? 좌우간 그런 막막함이 길어지다 보면 신경이 날카롭다는 표현은 옛말이 되고 말지. 신경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초기 단계에 느끼는 현상이고 나중에는 아예 무감각해지는 것이 보통이거든. 형규 너에게는 생소한 현상일지 모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이므로 조급해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게다."
"전에 없던 변화라서 그런지 사람답지 않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단 말이야."
"바로 그것이 몸부림이라는 거야. 노인들에게는 그런 변화를 찾아볼 수 없는 법이거든. 삶을 체념해버린 까닭에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평온한 죽음밖에는 없거든. 자네가 느끼는 상태가 바로 삶을 정복하려는 욕망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나? 그래! 욕망이야말로 살아있다는 확인 아닐까?"
"욕망? 듣기에 그럴 듯한데."
"자네가 느끼고 있으며 그것을 붙들고 괴로워하는 실체가 바로 욕망이란 말일세."
"자네야말로 글을 써야하겠군 그래. 군더더기 하나 없는 심플한 소리로 글을 쓰면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하겠는데. 어때? 소리 한번 하지 않겠나?"
"시인 앞에서 주제넘긴 싫으이."
"자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얕보면 나도 생각을 달리 하겠네."
"공갈? ... 이 구석 저 구석 쿡쿡 찌르지 말고..."
"나까지 잡을 셈인가?"
"알았어. 대신 너무 기대했다가 실망하지는 말게나."
"별 사설이 길기도 하군 그래. 얼마나 사람을 놀래게 하려고 전주가 그렇게 길어."
"또 그런 소리!"
"알았다니까."
"그럼 목청 좀 가다듬고...."

나는 지금
나는 지금 詩人과 술을 마십니다.
그가 둘도 없는 벗이라서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노래를 부르니 하늘 끝까지 흘러 흘러....
나는 지금 詩人과 사랑을 합니다.
그가 하나 뿐인 연인이라 하늘위로 마냥 날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춤을 추리니 꿈속을 거닐고 맙니다.
나는 지금 그대와 함께 있습니다.

형규는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마침내 잠에서 깨어나듯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는 나를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더니 어깨로 손을 가져가 나를 가볍게 쓸어주었다. 그리고 흥에 겨워 입을 열었다.
"역시 고운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면이 있군 그래. 자네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아니면 조금 전과 같은 詩는 나올 것 같지 않거든. 여태까지 자네의 번뜩이는 소질을 몰랐다고 생각하니 멍청하기 이를 데 없군. 자네야말로 노력하면 당장이라도 이름을 날릴 수 있을 것 같군. 학자 시인. 그럴 듯 하지 않은가?"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빈정거릴 걸 예상했으면서도 선뜻 자네의 최면에 넘어간 네가 팔푼이란 말이야. 어쨌든 나의 경박함을 용서해 주게나."
"진심으로 하는 소린데 왜 그래? 우리 사이에도 통역이 필요할까?"
"그건 그렇고 소설을 쓰겠다고 한 동기는 뭐였지? 구체적인 생각이 있었기에 비록 머리 부분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썼던 게 아니야?"
"요즈음 생활이 복잡하다 보니까 요행수를 생각해 본 것 뿐이야. 시를 써서 한판 승부를 하기는 힘들지만 소설은 구성과 스토리만 제대로 들어맞으면 사람들이 꼬여들기 마련이거든. 자네나 나같이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에게는 타향살이를 하다보니까 남들보다 할 말이 많은 법이지. 내가 쓰려고 했던 소설도 아메리칸 드림을 가슴에 안고 미국으로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어. 천국과 현실의 대조. 미국이라는 꿈의 나라에서 겪어야 했던 쓰라린 개꿈. 불행의 파상적인 공격에서 어느 정도의 삶을 포기하다가 lotto 한 장으로 지난 삶을 보상받는 주인공의 이야기. 다분히 신파적인 요소가 많지만 한 젊은이의 삶의 고저를 담담하게 써보고 싶었지. 어쩌면 내가 바라는 것이 물질적인 풍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처음 몇 장을 써내려 가면서 그 속에 너무 몰입하는 것 같았어. 일 주일도 안되어 글을 끝내긴 했지만 왠지 나에대한 일기를 쓴 것 같아 기분이 우울해 지더군. 여하튼 내가 만들어낸 괴물이니 그 문제를 해결하느라 고민 좀 하게 되었지. 실패의 연속인 삶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글 속의 그 친구가 되고 싶었거든."
"나는 자네가 외도하는 것 같아 걱정을 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소설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구먼. 언제 그 소설을 보여주지 않겠나? 시인이 쓴 소설이라면 뭔가 달라도 다른 점이 있겠지."
"습작을 가지고 뭘 그러나? 이제는 시간도 많이 있으니까 닥치는 대로 써볼 생각이야. 소설이건 시건 하물며 잡문이라도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모두 써볼 작정이지."
"다작을 하더라도 열심히 써보게. 그러다 보면 그럴듯한 글이 분명히 나올테니까."
"고맙다. 정신없이 이야기를 하다가 술잔이 빈 것도 몰랐군. 한잔 채워주지 않겠나."
나는 형규의 잔을 채우면서 그가 의욕적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는 사실에 흡족해 하였다.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그의 모습을 다시 발견해서 술맛이 났다. 형규의 존재는 글과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부각된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그가 술잔을 바라보면서 아무 말 없이 있는 그 순간도 창작을 위한 준비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시인 친구 형규가 바로 나의 곁에 있는 것이다.
"집에서 식구들이 기다릴 테니 이만 일어설까?"
형규는 내 걱정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고자 하였다. 나는 그를 다시 앉히고 나서 한마디를 더하였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자네의 근황이나 더 들려주지 않겠나? 이를테면 시의 주제 같은 것 말일세."
"새삼스럽게 근황은 무슨 근황? 지금까지 지껄인 것으로 충분할 텐데 뭐?"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헤어지기가 섭섭해서 그래."
"멀리 떨어져서 사는 것도 아닌데 섭섭하긴! 전화로 연락하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데 왜 그래?"
"그러다가 자네 작업에 방해라도 되면 어떻게 하라고?"
"소심하긴! 그런 생각 말고 보고 싶으면 언제라도 건너오라고."
"정녕 헤어지려면 집에 가기 전에 詩仙의 글 한 수 더 읊어 주게나."
"자네 왜 그래? 투정부릴 나이는 오래 전에 지난 거 아니야?"
"형규! 그러지 말고 시원스럽게 한 수 뽑고 자리를 뜨세."
"그 친구 고집 한번 대단하군. 알았어.

酒 讚
쓰디쓴 삶의 고름이 상처 위로 흘러나온다.
언제 이었는지 내가 기억할 수 없는 그때부터 썩어가기만 하였던 靑春.
그 때마다 술을 찾아 밤길을 헤맸고 平和를 만나니 술은 나의 사랑
세월로 변하는 세상의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주름으로 가득하여 가슴속까지 아픔을 전할 때 변함없는 친구를 찾아 술을 들이킨다.
술은 나의 참벗 밤으로 돌아오는 인생 행로에 술만이 나를 배웅한다.
술은 나의 믿음.

자, 이쯤으로 그만하고 돌아가도록 하지. 술맛이 좋아서 웬만큼 취한 것 같거든."
나는 형규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술을 사랑하는 그가 먼저 일어나자고 하니 그대로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읊은 술을 찬미하는 노래가 귓가에서 생생하게 맴돌았다. 문 밖으로 나오자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코끝을 때리고 도망간다. 나는 형규와 어깨를 마주하며 짧은 순간동안 친구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녀석. 형규가 차를 몰고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를 지켜보았다. 밤이 오래 전에 내린 듯 거리가 짙은 어둠으로 덮혀있었다. 그 밤 속에서 정신이 깰 동안서성이다가 나도 집으로 돌아간다. 좋은 밤.




셋.



大洋에서 용케 버티어낸 몸짓
바다건너 대륙으로 사뿐히 내려앉아
고향 잃은 까마득한 그리움 물방울로 엉겨붙어
먼지처럼 空을 떠도는 魂의 세상 나들이
無感의 세월로 한겹 한겹 더하여
허름한 옷을 걸친 다음 회색 도시로 고독의 거리로.
한 평생 방황으로 지친
肉身의 껍데기 그대로 벗어 던지고
땅 모를 西洋 하늘로 돌아다니거라.
傳說 잃은 오늘 힘겨운 숨소리가
혼란을 거듭할 때 모두를 뒤로하고 떠나거라.
그대의 魂 自由舞로 살아나리.

내가 형규의 글을 발견한 것은 며칠이 지난 묵은 신문에서였다. 신춘 문예로 세상에 알려진 형규는 그의 글대로 자유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선 소감에서 그는 그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 글을 떠나서 십 년 동안 세상일을 하였습니다. 열심히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내게 다가온 현실은 언제나 머리를 숙여야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생계를 이어줄 밥줄을 놓아야하는 순간처럼 암담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나 '폐업선언'을 한 이후 깊은 잠에 빠져있던 욕망을 깨울 수 있어서 다행 이었습니다. 글이야말로 내가 호흡하는 유일한 공기라는 사실을 그 때 비로소 깨우쳤던 겁니다. 늦은 출발이라서 조급하기는 하지만 쉬지 않고 달려가렵니다. >
형규는 '폐업선언'의 뜻을 잊지 않고 있었다. 사업의 정리로 '폐업선언'을 하였지만 신춘문예 당선의 변으로 '개업선언'을 멋지게 해낸 것이다. 미국에서 보낸 세월의 낱 날들이 지금을 위해 뿌려진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형규가 밝힌 늦은 출발의 숨은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창 번뜩이는 詩精神을 등에 업고 다니던 청춘을 지나서 느지막이 문단에 기웃거리는 자신을 늦은 출발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한 것이다. 그러나 늦게나마 제 길로 들어선 형규는 행운아 일 수밖에 없다. 삶을 바로 보는 그에게 찾아온 행운은 도망치지 않으려는 듯하다.
형규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보름이 지난 후였다. 그 동안 서울을 다녀온 형규는밝은 표정을 지으며 내 앞에 나타났다.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없다가 만나서 서로 할말이 많았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반가움과 격려로 힘있게 흔들었다."축하한다. 드디어 해내었구나. 그런 경사가 있으면 연락이라도 해주지 않고...."
"오두방정을 떨며 자랑하고 다니는 것이 겸연쩍어서 그랬어. 미안하다."
"한 숨을 놓았으니 이제 한길로 달려가면 되겠구나. 잘 된 일이야."
"희소식이 하나 더 있어."
"기자?"
"눈치 하나는 알아줄 만 하구나. 그래. 어제부터 일 시작했어."
"이제 글을 쓰는가 했더니 또 발로 뛰어다녀야 하는구나. 詩作에는 지장이 없을까?"
"문화부에서 일하기로 했으니까 무리는 없을 것 같아. 세상 돌아가는 것도 곁에서 목격할 수 있으니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야지. 벌써부터 불평하면 우습잖아?"
"하긴 그래. 그렇지만 게으름을 피우지는 말아라. 일과 타협을 하다가보면 지금의 위치를 망각하기가 쉬워지거든. 전보다 더 노려해야 한다고 생각해라."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초부터 잘 풀려 가는 걸 보니까 금년에는 운수 대통하겠는데...."
"빈말이라도 고맙구나. 너도 소망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길 기원한다."
우리는 설렁탕으로 점심을 때운 후 짧은 만남을 대신하였다. 형규는 날개를 찾아 하늘을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기자라기보다는 전속 기고가로 활약하며 그의 글을 쉽게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딱딱한 기사의 문체를 詩語로 대신한 까닭에 그의 글은 여느 기자의 기사와 구별이 되었다. 형규는 늦바람을 피우듯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는 형규의 모습이 왠지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전력 질주하는 그의 의욕은 대단하였지만 그의 일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형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다. 지난번에 형규를 만났을 때도 얼굴은 밝은 편이었지만 건강은 자랑할 정도가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의 건강이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다. 나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암흑의 날을 서서히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당연히 치러야 할지 모를 대가이기에. 글을 쓴다. 시인이 보지 않는 가운데 그를 위해 긁적거린다.

思 友
눈 내리는 날 먼 길가는 친구에게 노자라도 전하고 싶소.
하얀 세상에 한 걸음 더해 가는 벗의 발자욱 나의 눈물 동냥 서럽기만 하오.
-함께 가자 그 끝까지.
속절없이 뇌이던 나의 소리 뒤로 그대의 육신만 남아 밤으로 더해 가는 思友.
깊어가는 겨울 쓸쓸한 凍風이 세상을 쓸어갈 때 홀로 남은 내마음 얼어붙은 大地 그대의 裸身.
그대로 가오.
짐 벗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오.
- 친구 생각을 하면서...

첫눈 내리는 날 형규를 생각하면서 몇 자를 적어 보았다. 불길한 예감으로 인해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다행히도 나의 예감은 빗겨가고 있었다. 형규는 자기의 천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가끔 그와 함께 저녁을 나누면서읽은 그의 의욕은 그칠 줄 모르는 샘물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좋았지만 그 의욕반비례하여 형규의 건강은 날이 갈수록 쇠퇴 곡선을 그려가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말로 그의 건강을 집고 넘어가기로 했다. 친구들과의 모임을 끝내고 나는 형규와 단 둘이 되어 그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형규. 일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 가면서 하는 것이 좋겠다.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는데 병원이라도 가 본 거야?"
"내 건강이 어때서?"
"그러지 말고 나랑 병원에 가 보자. 선배 하나가 병원을 하고 있거든 진찰이라도..."
"걱정할 것 없어. 하늘이 부르면 가는 수밖에 없지..."
"자네 무슨 소리를 그렇게 겁나게 하나? 말이 씨앗이 된다는 것쯤은 알면서 말이야."
"숨 놓는 그날까지 열심히 살다가 가려고 그러네. 일거리로 뛰어다니다가 간다면 그것보다 더 바랄 것이 있겠나?"
"자네 혹시 무슨 속셈이 있는 것 아니야? 이를테면 몹쓸..."
"넘겨짚긴... 때가 되면 알게 될 테니 성급히 앞서가진 말게."
"무슨 일인가? 먼 길 떠날 준비라도?"
형규는 더 이상 대꾸도 하지 않고 나만 혼자 남긴 채 훌쩍 떠나 버렸다. 내가 그의 약점을 간파한 것이 불쾌한 듯 말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무안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숨길 수 없는 흉터 같은 것이 있는 것을 알아내어 여간 염려가 되지 않았다. 혼자 모른척하고 넘어가기에는 사태의 심각성이 상식을 벗어난 것 같았다. 다음날 형규가 출근한 뒤 그의 아내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기로 했다. 동네의 diner 한 구석에서 그녀를 만났다. 간밤에 잠을 설친 까닭에 푸석푸석한 얼굴로 그의 처를 만났다. 잔뜩 긴장을 한 형규의 아내는 갑작스런 나의 출현에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가벼운 목례로 자신의 자리를 알렸다. coffee를 사이에 두고 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로 형규의 상태를 설명할까? 형규의 처가 이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그녀를 달랠 수 있을까? 공연히 형규의 처를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닐까? 온갖 잡념이 언어의 머리를 앞질러 머릿속을 빠르게 맴돌고 있었다. 대화술의 격식을 차리지 않고 정공법을 택하여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갔다. 형규에게 무슨 결정적인 위험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처음에는 남편으로부터 단속을 잘 받았던지 아니라는 답변으로 일관하던 형규의 처였지만 마침내 넘치는 서러움을 주체하지 못한 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문을 열어놓았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당혹감과 표현할 수 없는 찜찜함으로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감과 앞으로의 대책을 위하여 그녀가 털어놓는 넋두리를 한 단어 소홀히 여기지 않고 들어갔다. 천재들에게 내리는 저주가 형규의 주위에서 맴돌다가 마침내 형규를 땅 속으로 끌어내리려는 것이었다. 몇 년 동안 끌어왔던 사업 부진의 살얼음을 걷던 스트레스의 중압감과 그 무게를 견디어내려고 가까이 했던 폭음의 결과 형규의 간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글을 애인 삼아 밤을 세우는 일이 한두 날이 아니었고 기자랍시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을 혹사했으니 그 결과는 누가 보아도 뻔한 일이었다. 충분한 휴식으로도 회복하기 쉽지 않았던 형규의 건강은 이미 누구도 손을 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바지자락을 붙들며 눈물로 애걸하는 아내에 끌려 마지못해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의사의 입을 통하여 간 경화가 간암으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형규를 제외한 그 주위의 사람 누가 보아도 다분히 상식적일 정도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아마 어떤 심상치 못한 결과는 예측하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는 사형 선고의 실체를 아내와 함께 확인하고 난 당사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져버리는 절망감이 두 사람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지만 형규는 하늘의 섭리라도 받아들이려는 듯 체념보다는 순종의 마음으로 죽음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시한부의 인생 그 마지막을 글과 일로 마감하고 싶다는 형규의 마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피눈물을 흘리며 형규의 처가 오열을 한다. 그의 아내와 어떤 대책이라도 세워보려했던 짧은 생각의 끝이 이처럼 가혹하리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길을 건너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벽돌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고의 끈이 갑자기 끊어져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이제야 형규가 애곡하던 '폐업선언'의 숨은 뜻을 찾아내어 더없이 우울하기만 하였다. 열심히 뛰어 가려했던 한 인간의 마지막 소망이 운명의 거센 광풍에 낙엽처럼 의미 없이 날려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형규의 아내와 어떻게 작별인사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의 친구 형규가 하루하루 죽음의 문턱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형규가 머지않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는 사실이 내게는 마치 전염병처럼 변하여 매사에 의욕이 없어지고 사물에 대한 애착을 빼앗고있었다. 늦게나마 잃어버렸던 날개를 찾아 새롭게 단 형규가 이제 우리의 곁을 떠나 멀리 날아가려는 것이었다. 형규가 안개처럼 연기처럼 새털처럼 사라지려는 것이었다. 형규의 처를 만난 지 보름만에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만나자는 것이었다. 만사를 제치고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 머리 위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뜨겁게 달아 오른 태양을 피해 실내로 기어 들어갔다. 갑자기 변한 조명으로 눈앞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암흑의 원이 동심원을 그리며 외부로 일탈하려고 한다. 나는 발걸음을 띠지 못하고 실내의 물체를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서서히 실내의 사물이 정체를 들어내며 내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공간의 제일 깊은 구석에서 술잔을 비우고 있는 형규의 모습도 눈에 띠였다. 나는 형규가 그어 놓은 선을 지워가기라도 하듯 되도록 직선의 항로를 택하여 그에게 다가갔다.
"거절하지 않고 나와줘서 고맙다. 술 한잔할까?"
"대낮부터? 좀 이르지 않을까?"
"관습과 인식에게 끌려 다니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거든."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낮술은 감당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
"그래! 한 잔 따라라."
"공부는 잘되어 가겠지? 항상 내 문제 가지고 걱정을 끼치게 해서 미안하지만 네가 곁에 있어서 든든해. 우리가 미국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새삼스럽게 왜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 거야?"
"내 처를 만났다며?"
"......"
"추궁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술 그만 하는 것이 어때? 할 일도 많을 텐데..."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마시는 것 뿐이야. 맨 정신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거든."
"그 정도가 될 때까지 뭘 했어? 사람들만 안타깝게 하면 어떻게 하나!"
"구차한 변명은 하고싶지 않아. 운명은 선택의 여지가 없거든. 내가 아무리 도망가려해도 자신의 먹이를 포기하는 맹수는 없지 않은가?"
"운명? 스스로 포기한 삶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무책임한 것이 아닐까?"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겠나?"
"무슨?"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지만 그때까지라도 곁에 있어주게나. 내 곁에서 눈감는 일을 도와주면 좋겠어."
"......"
"동물적 본능으로도 시간의 끝을 예감할 수 있거든. 죽음의 순간이 멀지 않았어."
"당치 않은 소리!"
"뒷일은 남은 자들이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아무한테나 맡기고 싶지 않거든."
"그런 부탁이라면 거절하고 싶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아까운 시간 빼앗아서 미안하구먼. 자네와의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는 돌아가도 좋아. 나는 취하고 싶으니 상관하지 말고 가게나."
"형규!"
"미련 가질 것 없어. 섭섭하다고 말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그대로 있다가는 질식할 것 같았고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바깥에는 살을 에는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할키고 지나간다. 매서운 여인의 교성이 마음의 구석구석을 쑤시며 도망치는 겨울바람. 집으로 돌아와서는 무엇에 홀린 듯 정신없이 가슴속의 모든 것을 풀어 헤쳤다. 형규의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하면서 그 앞에서는 입술로 부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나.영원히 눈을 감으려는 형규를 생각하며 가슴으로 외친다.

終 時

그렇게 떠날 바에야 우리 서로 모르는 남이었더라면
겨울 보내는 쓸쓸함도 달갑게 받았을 것을
바람으로 태어나 하늘 위 떠도는 영혼으로
우리 곁에서 느꺼움만 남기고 떠나는 친구여 편히 가오
自由로 다가와 사랑의 꿈을 꾸게한 그대
깊은 잠 그대로 깨어나지말고 숨결처럼 가오
다시 돌아올 그날 생명의 시로 살아나고
꺼지지 않을 진리의 불꽃을 우리에게 안겨줄
나의 사랑 나의 친구.




넷.

형규의 죽음을 날씨마저 음산함으로 애도하고 있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눈물을 떨구려고 얼굴을 변해가고 있었다. 서른 네 해를 살다가 홀연히 떠난 나의 친구 형규. 살아있는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걸어왔던 그의 행로가 수많은 조객들 앞에서 나락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조객들은 형규의 시신 앞에서 눈물 동냥을 하고 있었지만 금방 등을 돌리고 나서는 젊은 시인의 죽음 앞에 나름대로의 해석을 달고 있었다. 형규는 영락없는 술꾼이 되었고 무절제의 표본으로 인생 낙오자의 오명을 벗을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결론을 빌자면 그의 죽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한 천재의 요절을 애도하기보다는 남은 자들의 승리감이 그들을 도취시키고 있었다. 나는 쓸쓸 하고 씁쓸한 허탈감 속에서 비열하기 그지없는 세상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었다. 형규에게는 시원스럽게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를 위한 애도 시와 잔일은 결국 나의 소관이 되어버렸다. 망부가 된 형규의 아내를 위로하기도 하였고 형규가 남긴 아이들을 가슴이 에이는 심정으로 힘껏 끌어 안아주기도 하였다. 나는 조객들 앞에서 형규와 마지막으로 만난 그날에 써 갈겼던 '終詩'로 천재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대신하였다. 벗을 잃은 나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고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살아남은죄책감으로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증오스럽기만 하였다. 형규를 매장하고 돌아오는 그 길은 혼란의 극치였다. 슬픔보다는 사고의 진공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찾으려는 허우적거림이 나를 압도하며 세상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나에게 속한 세상이 이날처럼 생경하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형규와 함께 보내었던 과거의 동산에서 유일한 생존자로 현재의 들녘에 나와있다는 바로 그 느낌이 죽음과 삶의 경계를 구분하여 기억과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이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 때문에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아내가 마치 죽음에서 돌아온 자를 반기듯 나를 끌어안았다. 형규에게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죄책감과 유족을 생각하며 달래야 했던 안타까움이 나를 보자마자 서러움으로 변하여 오열의 곡을 터뜨렸다. 연애시절부터 형규의 전설을 잘 알고있던 아내에게 형규는 남편의 친구만은 아니었다. 남편의 곁에서 격려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던 위로자 하나가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져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형규의 죽음은 아내에게도 남다른 감회가 따르는 것이었다. 내 품에 안기어 한 동안 가만히 있던 아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내게 편지 한 장을 건네었다.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형규가 나를 위해 마지막으로 목소리를 더하고 있었다.

< 수고했네. 나는 자네가 뒷일을 맡아 주리라고 믿었지. 다만 나를 쳐다보며 죽음의 순간을 봉인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마음에도 없는 말로 거절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왔다 가지만 자네만큼은 피땀 흘리며 삶의 깊이를 더해 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네. 자네의 순수한 눈망울 거짓 없는 바로 그 언어로 죽어 가는 영혼을 깨울 수 있다면 구천을 떠도는 신세가 되어도 기쁘이. 생명의 시야말로 자네가 가지고 있는 가장 순수한 표현일세. 한 번 던져 보게나.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자유롭고 선택된 일인가 몸을 던져보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지. '폐업선언'은 내게 국한된 일이 아닐 걸세. 세상을 밝히기 위해서 자네와 같은 순수한 인간이 시인의 옷을 입어야 한다네. 짧은 세상 나들이였지만 자네와 연을 맺을 수 있었던 나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네. 고맙고 아름다웠던 과거의 기억에 자네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하고 자유롭게 한다네.

- 나 떠나오.
빚진 세월 못 갚고 훌쩍 떠나는 나
흙으로 섞일 때 마음대로 하소
육신을 벗고 깃털로 넘나드는 魂이되어 腐土로 더해주리니
조금만 참아주오
뒤로 남긴 情 서럽다 恨이되어
천근 만근 족쇄를 채우며 찢겨진 사랑 붙잡고 가슴 애는 눈물을 떨구니
나 이 길로 가오
구천을 건너 북망산 바라보며 산길로 들어가오
거기 곡성 가득한 계곡으로 망혼 떠도는 황천으로
세상 나들이 접고 먼 길 떠날 채비할 시간
잊혀질 세월로 홀연히 떠나 갈 곳 잃고 헤매는 겨울바람으로 다시 오리니
그때라도 나를 안다마오
나 떠나오 홀연히 떠나오.

형규가 내 곁에서 조용히 속삭이고 있다는 착각이 현실보다 생생하였다. 나는 형규의 글을 끌어안고 하염없는 눈물을 떨구었다. 죽음의 무게에 짓눌려 삶의 본체마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던 그 순간에도 친구인 나를 위해 몇 자의 기록을 남겼다는 그의 배려에서 다시 한번 초인적인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그네처럼 그냥 떠나겠다는 형규의 인간미가 소박하기까지 했다. 하루의 한정된 공간에서 발버둥치는 나 같은 속물과는 확실히 구별된 형규의 세상 나들이. 형규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인생의 서사시를 죽음으로 완성한 천재시인 이었다. 남은 자를 부끄럽게하는 형규의 혼을 위해서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의 짧았던 생에 대한 속죄.
가을이 되어 미국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서울로 돌아가는 그 길이 몇해전 한국을 떠날 때의 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의미가 있었다. 형규를 보낸지 반년이 넘은 지금에야 그가 남긴 족적을 찾게 된 것이다. 글을 쓰면서 형규의 체온과 체취를만날 수 있었다. 형규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국과 형규의 육신에게 작별을 고한다. 공항이 던져주는 이별의 canvas 위에 이별의 노래를 그리기 시작한다.


하나로 믿어왔던 허망의 시간이 여지없이 깨어지고 맙니다.
돌이켜보면 눈감고 살아온 하루하루가 幻이었기에
늦게나마 기웃거리는 이 짓거리로도 또 다른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幻.
세상에 겉도는 모든 것이
한 번쯤은 그것에 홀려 저도 모르는 세월로 달려가곤 합니다
내라고 다를 것도 없지만 그나마 깨어있음에 기꺼워하여 이번만은 제대로 가고 싶습니다.
지금 탈출기를 지우고 폐업선언을 끝으로 세상 가운데로 힘차게 뛰어 갑니다
幻의 끝 삶의 시작.
학자로서의 '폐업선언'은 文人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시작이리라.
지난 세월 속의 환상이 끝을 맺고 새로운 삶으로 시작의 첫 단어를 써본다.

199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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