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記 行

하 나.

새벽으로 넘어가는 시간까지 술을 계속해서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와의 만남은 언제나 술로 시작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술 속을 헤엄쳐 다니며 쓰디쓴 과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던 것 같다. 그 날은 하루 종일 비를 뿌리고 있었다. 늦은 가을비가 인생의 황혼을 더욱 쓸쓸하게 그려 가는 그런 날이었다. 기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초조함과 조급이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받은 허탈감은 실망을 넘어서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실험 작품을 동료 예술인들 앞에서 선보이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를 지켜보는 나는 왠지 답답하면서도 울화통이 치밀었다. 같은 화가이면서 무관심으로 일을 처리하는 그의 친구들이 믿음직스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옆에서 되지도 않는 표정으로 무언의 위로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정이라는 화가의 스트디오로 되돌아갔다. 우리라고 해봤자 나와 최선생 그리고 집주인인 정화백과 불란서에서 왔다는 강이라는 젊은이 뿐 이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들의 모임에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이런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최선생은 나를 애인처럼 생각하고 어디라도 동행하고 싶어했다. 2 층으로 올라온 우리는 미리부터 준비해 놓은 술자리에 앉아 술 취한 소리를 더해가기 시작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소리로 혼탁한 세상에 우리는 공기를 흐려 놓으며 정리되지 않은 언어를 더해 가고있었다. 최선생이 혀 꼬부라지는 발음으로 먼저 말을 던졌다.
"승찬이 멋진 녀석이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친구지!"
그는 정화백을 빗대어 상대도 없는 말을 뱉었다. 그리고 나서 한 마디 더 하였다.
"나는 비겁한 기회주의자이지만 승찬이는 자기세계가 뚜렷한 예술가란 말이야. 과거를 청산하고 예술에 매달릴 수 있는 그의 결단력에 나는 언제나 비겁자로 남게된단 말이야. 가정에 연연하여 무엇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회색분자. 술 냄새를 맡을 때만 그런대로 고집스러운 말을 지껄이는 변사. 예술가라는 가면을 쓰고 다니는 인생의 패배자, 협잡꾼...."
내가 알고있는 최선생은 말을 아끼는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술이 들어가니 영 다른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술로 인해 그의 잠재세계가 열리기 시작한 듯 거침없는 회고가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어느 정도 취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 동조도 못하고 힘겨운 자기를 가누고 있을 뿐이었다. 인생유전으로 미국까지 흘러온 우리로써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의 중압감을 흉터처럼 지니고 살아야만 했다. 때문에 술이라도 들어가면 흉터가 도져 곪아터지기 일쑤였다. 예술의 허상을 쫓아다니며 어느 쪽에서도 만족 할 수 없는 처지가 우리를 언제나 패잔병으로 남게하는 것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털어놓으려 해도 그것이 새롭게 전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쓸쓸하게 사물을 지켜보듯 흘리는 말로 서로를 감쌓아 주는 것이 전부였다. 배를 움켜쥐며 화장실을 다녀오던 정화백이 최선생의 넋두리를 들었는지 흐린 실내 조명을 밝힐 만 한 눈빛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최형! 미안하구려. 어차피 시행착오쯤은 여분으로 가지고 다녀야 하니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는 이 한마디를 더하고 나서 맥주를 가지러 갔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최선생을 붙들고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면 찜찜한 마음은 풀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애매한 말을 던지고 사라진 그로 인해 최선생은 또다시 혼잡해 지는 것 같았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소. 이제 마누라에게 짐을 지우며 더부살이로 살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단 말이요. 젠장! 세상에서 바른 말하는 것도 흠이라니 더러워서 못살겠네... 정형 어디있소? 이야기 좀 합시다."
나는 최선생을 부축하며 그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애를 썼다. 그 순간 최선생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반가운 동지를 만난 듯 술냄새를 풍기며 웃어 보였다. 주름으로 얼굴의 구석구석을 덮고있는 그의 모습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형상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 섬뜻할 정도였다.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무슨 말을 찾아낸 듯 한마디를 흘렸다.
"정민아 좋지 않느냐? 실패자를 맞아주는 이 공간이."
그와는 20년의 나이 차가 있었지만 최선생은 언제나 나에게 존대를 해준 까닭에 지금의 반말식 어투가 도리어 어색하게 들려왔다. 나는 엉겁결에 그의 말에 동조를하고 말았다. 별다른 뜻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 터질 것 같던 긴장감에서 해방된 것 같습니다."
"너는 아직 젊으니까 나를 보면서 삶을 비껴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나이 쯤 되면 걸어온 길로 되돌아가기가 쉽지 않거든. 너의 천재성은 인정한다만 이 곳까지 흘러왔으니 너를 내보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서두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안주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야."
"새삼스럽게 그런 말씀은 왜 하시는 겁니까?"
"그림쟁이 짓을 그만 두고 싶을 때가 하루에도 여러 번 있지만 내가 보아온 정민이는 나와 다르니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보라는 말일세. 가령..."
"저 혼자 잘 살고있다고 할 수는 없지요. 저라고 무슨 독불장군이 되겠습니까?"
"문을 지나기 위해서는 수문장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예술로 들어가는 길에도 그런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
최선생은 말을 잇지 못하였다. 사고가 뒤엉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는 홧김에 정화백을 향하여 술을 가져오라 하였다. 정선생은 그때서야 어디선가 숨어 있다가 맥주를 들고 나왔다.
"최형 가만 들으니 한 군에 대해서 뭔가 말씀하시는 것 같던데..."
"이름 없는 사람들..."
"한군은 언젠가는 반드시 빛을 보게 될 거요. 한번 기다려 봅시다. 우리도 20년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20년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소파에 파묻혀 그의 존재를 잃어 버렸던 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놀라며 물었다.
"왜? 긴 세월 같은가? 금방일세. 우리가 지금 세월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것 같지만 지금의 순간도 잠시 뿐이라는 것을 자네도 언젠가는 알게 될걸세. 나한테도 자네같은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나."
"이제 겨우 인생의 서른 해를 넘겼는데 오십이 넘어야 세상에서 행세를 할 수 있다고 하시니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그런 것 같나? 참, 자네 불란서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파리에서 삼 년을 허송세월로 보낸 것 같습니다. 진작에 뉴욕으로 왔으면 두 분같은 대가를 벌써 만나 뵙고 방향을 정했을 텐데..."
"그래, 작품의 경향은?"
"신통치 않지만... 추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 혼자서 버티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버티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만 20년까지는 아무래도..."
"정화백야 20년이라고 하지만 나야 30년 넘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 그것도 앞이 안 보이는 안개 속을 헤매며 말일세."
최선생은 맥주를 계속해서 마셔가며 쓸쓸히 독백처럼 말을 이었다.
"첫발을 잘못 들인 때문이지. 철저히 혼자뿐인 자기와의 싸움. 그것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런..."
"최선생님이 어때서 그러십니까? 생활과 작품 모두 탄탄하신 분이니 기회가 닿는대로 언제든지 일을 벌리실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자네 지금 기회라고 했나? 기회라는 것이 무슨 뜻인 줄은 알고 하는 말인가?"
"뉴욕에 계시니까 아무래도 작품활동은 쉽게 하실 것 아닙니까?"
"자네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지?"
"이제 한달 조금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언제쯤이면 뉴욕을 알게될 것 같나?"
"몇 년은 살아야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지금 몇 살이지?"
"서른 셋입니다."
"그래? 앞으로 열심히 기다려 보게. 그리고 나서 자네가 이곳을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에게 알려 주면 어떻겠나? 아마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
"우리 나이쯤 되면 초조함은 없어지지. 서둔다고 안될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작품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기 기만이란 있을 수 없게 된다 이 말일세."
최선생은 다시 맥주잔을 비웠다. 나는 그가 술이라는 도구를 빌어 거짓을 포장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탈감에 젖어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초조에서 연유한 탈진임을 알 수 있었다. 죽음 앞에 서있는 인생의 황혼기. 그것을 거부하는 몸부림. 예술세계의 철저한 자유인.... 이것이 최선생이 평소에 내게 전해준 그의 생각들이었다. 비록 아내에게 경제권을 맡긴 형편이 되었지만 그 세대의 경상도 남자가 모두 그렇듯 엄부의 모습을 잃지않기 위해 때로는 주정으로 때로는 단 기간의 가출로 최선생은 최선을 다했다. 아내를 떠나서는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가 지면 집으로 기어 들어가는 그가 전념으로 미술을 고집하기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정선생과 나는 그의 생활을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때문에 술만 들어가면 뇌까리는 최선생의 넋두리가 아픔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용기가 없다고 하는 바로 그 말이 정선생과 비교하여 상대적 피해의식임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정선생은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하여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자유롭게 생활하고 계신 분이다. 홀로 지낸 지도 어느덧 15년이 되었으니 스스로 구속 없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의 인생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의 생활도 고독의 흉터 투성이라는 것을 쉽게 읽을 수 있다. 서울을 떠나면서 아내와 자식들을 버려야 했고 더구나 침묵만 강요하는 이방의 소리들로 둘러싸인 쓸쓸한 뉴욕 생활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고행뿐이었다. 따라서 넘치는 시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하기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다. 정선생이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그의 표정에 숨어있는 고독은 그리 가깝지 않은 나같은 사람도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 밤늦은 시간에도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고독을 잊으려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야기를 무척 좋아하지만 먼저 시작하는 적이 없었고 항상 누군가 말을 꺼낼 때까지 가만히 듣기를 즐겼다. 홀로 사는 덕택에 듣기를 탐하는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지금 최선생이 자신의 과거를 그려 가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정화백의 기분을 전해 받은 때문이리라.




둘.

1973년 겨울 (冬行)
최인규는 지금 경원선을 타고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개학을 앞두고 발동하기 시작한 그의 탈출 벽이 기차를 떠올리게 하였고 몇 푼 안 되는 주머니 사정으로 편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숙직 근무를 하다가 갑자기 속초에 있는 양준혁이 떠올랐다. 양준혁은 속초에서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아가면 울적한 마음이라도 달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나서는 것이 그의 계획 전부였다. 상황을 되돌아 볼 여유가 있었다면 개학을 사흘 앞둔 시점에 그것도 숙직 근무를 하던 그가 이런 식으로 무작정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날씨가 꾸물꾸물해서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했고 할 일없이 학교건물을 지키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행 완행 열차 표를 산 다음 아무 준비 없이 몸만 달랑 실었다. 결혼 한지 삼 년밖에 안되었는데도 현실은 결혼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찌 보면 결혼 전보다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국어선생과 결혼할 당시에는 동료 선생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지만 막상 결혼 생활이 그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요즈음의 일 이었다. 딸아이가 칭얼거리거나 이유 없이 보챌 때면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작품 세계를 포기하면서 까지 세월을 죽인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비추어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를 두고 불평을 하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한 채 학교에 출근하는 아내를 억척이라고 부른지만 남편에 순종하는 그녀를 모두들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깔끔한 성격으로 학생들은 물론 선생들 사이에서도 아내는 인기가 꽤 높았다. 사정이 이쯤 되니 아내를 욕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는 격이었고 방랑벽을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 메자니 안에서는 반란의 불이 견딜 수 없는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최인규는 스스로를 역마살이 낀 팔자라고 믿었다. 때문에 자신을 한 곳에 붙잡아 두는 어떤 것도 그의 운명을 거르는 행위라고 거부할 정도였다. 교직생활을 한지가 6년밖에 안 되었는데도 그 동안 직장을 네 번이나 옮겨야 했다면 그의 괴팍한 성격도 알아 볼만하다. 대낮부터 수위와 마시던 소주로 인해 양준혁이 떠올랐고 잠자고 있던 그의 방랑벽이 욕망으로 변해 그를 이렇게 밀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 동창인 양준혁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그런지 비교적 생각이 트인 친구였다. 선생으로서는 드물게 부동산으로 돈을 모으는가 싶더니 사기꾼에 재산을 날리고 연고도 없는 속초로 내려간 뒤에 다시 일어나 지금은 여관을 경영하고 있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친구를 찾아가면 묵은 회포도 풀을 수 있을 것이고 지칠 때까지 있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홀가분한마음으로 청량리역까지 달려오긴 하였지만 육체의 간사함과 연약함을 떨쳐 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뱃속으로부터의 반란은 참으로 대단하였지만 주머니 사정은 그에게 억지 잠을 명령하는 것이 전부였다. 공복의 불쾌감은 그 도를 넘어서 위액의 홍수를 일으켰고 참을 수 없는 아픔을 더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귀와코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금 그가 앉아있는 곳은 시장바닥과 다를 바 없이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의 절제 없는 외침은 아우성이었고 모두들 아무 괘념 않는 일상의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억지로 시장기를 달래고 있는데 누군가 최인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최인규는 모른 척하고 그대로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음식 냄새로 위액의 분비 활동이 전보다 왕성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앞에앉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삶은 계란을 곱게 까서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소금을 적당히 묻혀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내민 그녀의 손등은 거칠게 터져 있었다. 최인규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누런 이를 내보이며 말을 걸어왔다.
"아까부터 선생님을 지켜보았는데... 아무 것도 안 드시는 것 같아 몇 알 까보았습니다. 달리 생각 마시고 시장 끼라도 달랠 겸 들어보세요."
"괜찮습니다. 참을 만합니다."
"어디까지 가시는데요?"
"속초에 있는 친구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속초까지라면 아직도 한참을 가야 하는데 그러지 마시고 요기 좀 하세요."
"아주머니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사실 저는 속초가 처음 이거든요."
"저도 속초까지 내려가는데 마침 잘 됐네요. 선생님과 동행 아닌 동행을 하게되어 반가워요. 그러니까 편하게 생각하시고 이거라도 들어보세요."
인규는 여인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하고 그녀가 내미는 삶은 계란을 받았다.아까 마셨던 소주도 정신을 차리는지 갑자기 오한이 나던 차에 염치 불구하고 계란을 받아먹었다. 여인은 언제 준비하였는지 사이다 병을 그에게 내밀었다.
"목이 메이실테니 마셔가면서 드세요. 여기 계란 하나 더 있습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습니다. 염치없이 주시는 데로 받아먹습니다."
인규는 계란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한입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염치고 뭐고 없었다. 어지간히 속이 출출했는지 그녀가 건네주는 계란을 연거푸 세 개나 먹어 치웠다. 그리고 나서야 허기를 채울 수 있었는지 여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계획 없이 기차를 탔기 때문에 준비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다행이 아주머니 같은 분과 동행을 하게 되어 이런 신세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맙습니다."
"언뜻 보기에도 행상 같지는 아닌데 어떻게 해서 속초행 기차를 타게 되었나요?"
"사실은 부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시군요. 어째 그럴 것 같다고 했더니 역시... 그런데 무슨 과목을.."
"미술 선생입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속초는 무슨 일로?"
"중학교 동창이 그 곳에 있습니다. 갑자기 그 친구가 보고 싶고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어서 준비 없이 기차에 오르게 된 겁니다."
"아, 그러세요. 속초 어디쯤 되나요"
"친구가 그곳에서 동해여관을 한다고 하는데 쉽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양사장님 친구분 이시군요."
"잘 알고 계십니까?"
"속초에 내려가면 내 집처럼 드나드는 곳이지요. 역에서 멀지도 않고 깨끗한 여관이라 사람들이 꽤나 붐비지요. 그곳까지 제가 모셔드릴 수 있으니 잘 되었군요."
"그렇게 해 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혼자서 다니시나 봅니다."
"혼자 된지도 벌써 십 여 년이나 되었지요. 팔자가 기구한 년이라 이런 역마살이 낀 것 같아요. 이제 이 짓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별 도리가 없으니 보따리장사를 천직으로 알고 삽니다."
"그러셨군요. 혼자 다니시면 어려운 일도 많이 있겠습니다."
"어렵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으니 넋두리 할 곳도 마땅치 않아요."
"그래도 혼자서 열심히 살아가십니다."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요."
"...."
"...."
"그런데 속초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앞으로도 열 시간 이상은 가야 할거예요. 그것도 중간에 눈이라도 내리면 얼마나 걸릴지 장담 못하게 되는 거구요. 그나저나 선생님의 옷차림으로는 추위를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곳 날씨를 전혀 예상 않고 오셨겠지만 폭설로 길이라도 막히면 얼어죽기에 안성마춤이겠어요."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되겠지요."
"낙천적이시군요. 세상에 염려 하나 없으신 분 같아요."
"어차피 발가벗고 나왔는데 걱정한다고 운명이 바뀌기라도 합니까? 죽지 않으면 내일 하루도 또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한참을 가야하니까 눈 좀 부치세요. 근처에 도착하면 어차피 모두 내려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편안히 주무시는 편이 좋으실 거예요."
"그런가요? 그러면 나중에 깨워 주시겠습니까? 혼자 남는 신세가 되면 그것도 우스울테니 아주머니가 깨워주시면 더 없이 고맙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잠이나 청해 보세요."
인규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부산을 떠난 지 하루 반나절이 지난 한 밤중이었다.인규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인규를 흔들어 깨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는 침침한 눈을 비비며 허공을 쳐다보다가 잠에서 억지로 깨어나려고 기지개를 폈다. 여인은 단잠을 자고있던 인규를 깨운 것이 미안한 듯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인규는 그제야 자신이 속초행 기차를 타고 있었던 것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무척 피곤 하셨나 봐요. 네 시간이나 주무셨는데도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시더군요. 엔간해서는 깨울 생각이 없었는데 기차가 더 이상 앞으로 못 간다기에... 아무래도 이 근처에서 여장을 풀어야 할 것 같아요. 한 밤중이라 어디에 연락하기도 쉽지 않지만 연락을 받아도 여간해서는 달려오지 못할 거예요. 제설 작업이 끝나고 철도가 다시 개통되려면 적어도 이틀은 걸린다고 하네요. 어떻게 하지요. 선생님께서 머물 곳이 마땅치 않을텐데..."
"낭패로군요. 가지고 있는 돈으로 요기를 하고 나면 그만 일텐데..."
"돈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요. 사람이 먼저지 돈이 먼저겠어요? 대단한 곳은 아니지만 눈 부칠 정도는 될만한 장소가 있으니까 따라오세요. 겨울에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이런 일이 생기니까 저희들이 찾는 곳이 따로 있지요. 선생님 같은 분이 머무실 데가 못되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이참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 직접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까지 생각해 주셔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는 것도 제게는 감지덕지 아니겠습니까?"
"젊으신 분인데도 속이 시원스레 트여서 좋군요. 그러면 조심해서 저를 따라오세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몸을 녹이기에 적당할 겁니다."
인규는 여인의 뒤를 따라 눈길을 걸었다. 가슴까지 차는 눈 속을 거닐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산에서는 눈 구경을 하기도 쉽지 않지만 어쩌다 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 버리는 것이 상례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 경험은 예상조차 못한 색다른 것이었다. 그녀 말대로 추위를 염두에 두고 떠난 여행이 아닌지라 뼛속까지 저려오는 한기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신체의 구멍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얼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겨울 여행이 익숙한 듯 봇짐을 머리에 잇고서도 인규를 한참 앞서서 걷고 있었다. 남자 체면에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것 같아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빨리 달려가려고 그럴수록 눈 속에 깊이 빠지는 발 때문에 몸의 균형을 잡기도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려하면 그나마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자빠지기 일쑤였다. 인규는 그러면서도 어떤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권태뿐인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과 맞딱드리는 순간 최초로 그의 삶이 어떤 의미를 발견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눈 속을 헤매다 보니 정신이 명료해지는 것 같았고 무의미하게 흘려 보냈던 지난 삼십여 년의 삶이 생기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그는 속으로 다짐을 해보았다. '돌아가면 바로 이런 그림을 그리겠다. 살아있는 내 모습을 느낀 그대로 그리다 보면 무엇인가 잡힐 것이다. 도시의 침침한 문화공간에서 자연의 생기를 찾을 수 있도록 지금 바로 이 순간을 그림 위에 옮겨 놓을 것이다.' 그는 눈 속에 몸이 몇 번인가 쳐 박혀 들어가면서도 가슴으로 웃을 수 있었다. 다시 살아난, 내부로부터의 음성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외부로부터의 자유를 찾고자 했던 그의 의도가 폭설 때문에 중단되었지만 도리어 그 폭설로 인해 이 순간 그는 진정한 내적 자유를 체험한 셈이다. 눈 속에 파묻혀 몸을 뒹굴리고 싶을 정도의 자유로운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바로 이 순간 죽음이라 해도 친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상태라면 죽음도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살고 싶은 욕망만큼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드디어 그녀가 말하던 여관에 이르렀을 때 인규의 몸에서는 연기 같은 것이 솟아오르고 있었으며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 좋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살아 있는 자신이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하루를 더 보낸다면 궂이 속초에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홀가분해 졌거든요."
"눈 속을 거닌 것이 처음인가 봐요? 처음이야 모든 것이 새롭고 감격적이지만 생활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면 지겹다는 생각뿐이지요. 눈 때문에 낭패를 본적이 한 두 번이 아니거든요. 며칠만 더 계셔 보세요. 지금 같은 느낌이 싹 사라질게 분명 하거든요. 그나저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세요. 체온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감기라는 놈이 덤벼들거든요. 이런 날씨에 몸을 함부로 굴렸다가는 영락없이 몸살 걸리실 거예요."
그녀는 인규의 손을 잡아끌고 여관방으로 들어갔다. 좁은 방안에는 여행에 지쳐있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남녀 구별도 없이 지친 몸을 길게 뻗어 하루의 피로를 달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녀와 인규가 방안으로 들어왔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성가신 사람들이 찾아온 듯 비좁은 공간을 나누는 것이 탐탁지 않은지 개중에는 눈살을 찌푸린 사람도 있었다. 여인은 인규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엉덩이로 방바닥을 몇 번인가 가누었다. 그때서야 누워있던 사람들 중 몇몇이 몸을 한쪽으로 돌리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녀는 대단한 싸움에서 승리라도 한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짓으로 인규를 불렀다. 인규는 누워있는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피해가며 그녀가 만들어 놓은 자리로 갔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인규에게 속삭였다.
"선생님 이만하면 그런 대로 몸을 녹일 수 있을 거예요. 누추하지만 눈을 부치기에는 괜찮은 편이지요. 지금 눈 내리는 걸로 봐서는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요. 나중 일을 생각해서라도 휴식을 취해 두는 것이 좋을 꺼예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은 요기를 하실 수 없으니까 아침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때까지는 시장 끼를 참으시고 눈 좀 부치세요. 생각 같아서는..."
"저는 견딜 만 하지만 아주머니가 어떠신 지 모르겠습니다."
"......"
"피곤하실 테니 눈 좀 부치십시오."
그녀는 인규의 곁에 누웠다. 체면을 가리지 않고 제 멋대로 하는 그녀의 행동이 도리어 당당하기만 하였다. 인규는 주위를 한번 훑어보고 나서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그녀의 곁에 눕고 말았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니 그녀의 땀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행상 여인에게서 그윽한 향수 내음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체취가 독특하였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등을 맞대고 있던 인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돌려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피곤에 지쳐있던 여인은 어느새 잠들어 버렸지만 인규는 몸을 뒤척거리며 잠을 설치고 있었다. 학생들 가르침을 업으로 하는 자신이나 행상으로 밥벌이를 하는 그 여인이나 모두 장사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나 그녀와 자신을 비교해 볼 때 끝없이 부끄럽기만 하였다. 그녀의 삶은 거짓이 없었고 그 삶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에서 권태를 느낄 일도 없을 뿐 아니라 작품의 완성을 위해 가정을 팽개치는 탈출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왠지 쓸쓸하였다. 화가라는 가면을 쓰고 예술을 최고의 가치로 믿어왔던 삶이 한순간 붕괴하는 것 같았다. 아내와 딸의 울타리에서 거리낌없이 도망쳐 나온 자신의 행동이 더없이 유치해 보였다. 양준혁을 찾아간다 하여도 그가 인규의 삶을 진단하고 치유해 주는 사람이 아님을 인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조만간 지금과 유사한 탈출이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비록 그의 도움으로 부산 생활을 청산한다 해도 언젠가는 역병 도지듯 여행지를 찾아 헤맬 것이 확실했다. 갑자기 아내와 딸아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틀 동안이나 아무 소식 없이 잠적했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뻔한 일이다. 인규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삶이 의미 없는 나락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처자를 팽개치고 떠난 지금의 자신을 생각해보니 부끄럽기만 하였다. 역마살이 끼었다는 여인보다 인생을 아무렇게 휘갈기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고 오지도 않는 잠을 불렀다. 밖에는 아직도 눈발이 내리는지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내며 땅을 덮는다. 목적없이 달려온 여행이 예기치 못한 폭설로 중단되어 도리어 다행이었다. 삶의 신비와 의도를 진작에 알았다면 지금같이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규는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알았다. 눈 속을 헤쳐왔을 때 느꼈던 흥분과 달리 차분히 가라앉은 새로운 욕망을 느낄 수 있었다. 어디로 도망쳐도 결국 자신의 삶을 운명으로 받아 들여야 하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하나 하나 정리되고 있었다.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한번쯤 진실되게 살고 싶었다. 그는 다짐했다. '예술을 하던 평범한 가장으로 가정을 꾸려가던 더 이상의 탈출은 안 하리라.'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밥을 먹은 뒤였다. 어젯밤부터 동행했던 여인도 벌써 일어나 세수를 한 후 싸구려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얼굴을 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인규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다음 반가운 얼굴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 일어나셨군요. 언제 깨어나실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른 세수하신 다음에 국밥을 드시도록 하세요. 저도 선생님과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직 식사 전 이거든요."
"먼저 하시지 그려셨습니까? 저는 천천히 해도 되는데 말입니다."
"이왕에 기다린 것이니 세수하신 다음에 함께 먹도록 하지요."
인규는 밖으로 나가 찬물로 얼굴을 적시고 들어왔다. 밤사이에 그칠 줄 알았던 눈이 아직도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바라보는 세계는 온통 하얀색으로 덮여있었다. '설국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인규는 혼자 감탄하였다. 행상 여인과 아침을 먹고나니 눈이 그쳤다. 인규는 간밤에 결심했던 대로 모든 계획을 바꾸어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러나 폭설로 두절된 철로가 언제쯤 개통이 될지가 의문이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스케치북을 꺼내어 눈에 보이는 것을 열심히 그렸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신기한 듯 하나 둘씩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무슨 말을 지껄이며 감탄을 하기고 하였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위함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즐겁게 해준 것 같아 흐뭇했다. 오랜만에 여가를 즐기듯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기찻길이 열릴 때까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기찻길이 뚫렸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이제 앞길이 정해진 이상 주저 할 일이 없었다. 강릉까지 올라가서 하행 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갈 작정이었다. 그녀는 강릉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녀가 역까지 와서 기차를 기다려 주겠다고 고집하는 것을 그는 가까스로 만류하였다. 이름도 모르는 여인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규는 그녀와 함께 역 근처의 다방으로 가서 작별의 커피를 마셨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다. 비록 완전한 남이었지만 지난 이틀 동안의 동행으로 그들은 말이 필요 없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은 인규는 스케치북을 꺼내어 그녀를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지난 이틀 동안 그녀로 인해 새롭게 돌려 받은 삶이야말로 인규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놓은 순간이 아니었던가?스케치를 마친 인규는 그것을 그녀에게 건네주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단한 건 아니지만 받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달리 보답할 것이 없어서... "
"선생님 고마와요. 인연이 있으면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녀는 인규로부터 받은 그림을 돌돌 말아 귀중하게 간직한 다음 더 이상 그를 귀찮게 굴지 않으려는 듯 가벼운 인사를 하고 다방을 빠져나간다. 그녀가 나간 다음 한 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인규는 식어버린 커피를 비우고 나서 다방을 빠져 나왔다. 밖으로 나온 인규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돈이 없었다. 난감한일이었다. 무작정 떠나온 여행이었기 때문에 부산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었다. 생각다 못해 결혼 예물로 받은 시계를 팔기로 했다. 가까운 전당포에서 시계를 팔았다. 돈을 손에 쥔 인규는 여비와 허기를 달랠 수 있게되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인규는 무심코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간밤에 내린 눈이 하늘의 먼지를 다 씻어 버려 눈이 부셨다. 설국의 오후가 태양의 반사로 더욱 찬란했다. 그는 거리에서 싸구려 색안경 하나를 샀다. 그리고 방금 산 선글라스를 멋지게 끼고 역으로 걸어갔다. 그가 낀 색안경이 인규의 새로운 삶을 바라보는 미래경 같았다. 차표를 산 그는 몇 분 후면 떠나야할 이 도시의 그림을 기억으로 남기려는 듯 천천히 둘러보았다. 눈이 쌓여있는 거리가 깨끗하고 순결해 보였다. 동행했던 여인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로 인해 인규의 삶이 제 궤도로 돌아왔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거리의 구석 구석을 둘러본 인규는 곧장 역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보금자리가 눈앞에 떠올랐다. 예술의 살아있는 호흡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최선생이 이야기를 마치자 구석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던 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생의 이야기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맥주를 마시면서 목청을 가다듬은 그는 최선생의 이야기를 받아 자신의 여행담을 이어 놓으려 했다. 불란서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궁금하기만 하였다. 나와 동갑내기인 그의 삶을 들어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 될 것 같았다. 그는 맥주의 마지막 한 방울을 입안으로 부어 넣으려고 고개를 뒤로 젖힌 체 깡통을 하늘로 곧게 세웠다. 마지막 행동을 끝내고 사서야 그는 이야기 보따리를 끌러 놓았다.




셋.

1979년 봄 (春行)
강남식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방금 확인한 대입 합격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살려면 언제나 빗겨가는 삶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밑으로 동생이 둘이나 있으나 그들에게 그럴듯한 삶의 모범이 되어주지 못하는 자신이었기에 이번만은 적지않이 기대를 하고 있었던 차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보통 때와 다름없이 한심한 결과를 맛보게 된 것이다. 부모님이라도 계셨다면 그들의 위로를 받았을 테지만 그것조차 여의치 않아 그저 씁쓸하기만 하였다. 첫 관문에 실패한 삶이 앞으로 있을 고난을 예고하는 것 같아 현실의 좌절과 함께 앞으로의 삶이 불안하기만 하였다. 남식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냉혹한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고 든든한 보호막도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패자가 되어 쫓겨나는 꼴도 처참했다. 전 후기 모두를 낙방하고 나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도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 한강에 가서 한 많은 세상을 끝낼까 생각해 보았다. 구차한 변명보다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홀연히 떠나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발걸음이 제2한강교로 향하고 있었다. 서교동에서 얼마 안 걸어 왔는데도 멀리서 교각의 선이 확실히 들어왔다. 먼저 대형 건조물이 인상적이었고 좀 더 가까이 다가서니 여인의 부조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 남식은 숫총각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이 처량하기만 하였다. 또한 대낮에 자살한다는 것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수룩한 행동을 발견하고 누군가 말린다면 비장한 자살극도 미수로 끝나버릴 것이다. 남식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죽음의 시간을 약간 미루어 인적이 드문 밤중까지 유보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죽음의 행위가 야릇한 흥분까지 자아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 멋지게 죽어보는 거다. 이번만은 제대로 실수 없이 죽어야지.' 그는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합격의 영광을 누리기 위해 목포에서 올라왔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것이다. 이왕 죽을 바에야 술독에 빠져 원 없이 마셔보고, 그렇게 궁금한 여자의 신비도 한번 경험하고 죽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여자를 경험하려면 몸파는 여자를 사면되겠지만 그 알량한 총각딱지를 그런 여자에게 상납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촌놈이 이왕 죽을 바에야 서울여자를 끌어안고 하루 정도는 보내야지!' 이런 각오를 하고 나니 용기가 솟았다. 그는 시골부터 익히 들어온 명동성당을 머리에 떠올렸다. 그곳에 가면 멋쟁이 여자를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죽기로 작정한 이상 기가 막힌 최후를 장식하고 싶었다. 남식은 거리낌없이 합정동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미도파 앞으로 갔다. 길을 잘 모르는 남식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명동 입구까지 걸어갔다. 아직도 겨울 바람이 매서운 날씨였지만 원대한 음모를 떠올리니 흥분되어 추위도 잊을 정도였다. 그는 명동성당을 향해 걷고 있었다. 죽기 전에 성모를 찾아 뵙고 마음의 응어리를 털어놓으면 게운 할 것 같았다. 그 곳에는 멋진 여자들도 많아서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모 병원 입구에서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객지에서 아는 여자라도 만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모의 온아한 자태가 남식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고민을 성모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성모님! 처음 뵙습니다. 초면이지만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해 왔기 때문에 낯설지는 않습니다. 사시사철 한자리를 지키시면서 온갖 사람들의 넋두리를 들어주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성모님을 한번쯤 위로해 드리고 싶지만 오늘로 세상을 끝내는 마당이니 저도 별 도리가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 생각하시고 제 넋두리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 주셔도 그만이고 한 귀로 흘리셔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귀찮다 마시고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그는 만남의 서두를 인사로 장식한 다음 성모의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하려는 듯 침묵으로 얼마를 기다렸다. "성모님! 저는 목포에서 올라온 대학 낙방생 강남식 입니다. 일찍이 부모를 잃었기 때문에 남들 같은 호강이나 어리광을 부려본 적이 없는 불쌍한 놈입니다. 대학 문턱에서 넘어져 쓴맛을 보게되니 그 동안 살아왔던 날들이 지겹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오늘 밤 한 많은 세상을 떠나려 합니다. 죽기로 작정하였지만 여자의 신비도 모르고 떠나려고 하니까 아쉽기만 합니다. 성모님을 처음 뵙는 처지에 무리한 부탁인줄 알지만 이제 죽는 마당이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멋진 서울여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한 번이면 됩니다. 그 여자를 추근거리지 않을 것이며 아픔을 남기지도 않을 작정이니 오늘밤을 함께 보내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 되면 이 몸을 바쳐 성모님께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제발 한번만 부탁합니다. 다음에 찾아와서 귀찮게 굴 일도 없을 테니 못이기는 척하고 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식은 두 손을 모아 넋두리 반 협박 반의 간절한 기도를 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지만 남식은 기도를 마치고 나서도 한참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자신의 청이 한심섞인 생떼 같았지만 그래도 기도를 하고 나니까 믿는 구석이 생겨서 그런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때 한 곳에서 동상처럼 성모상을 지키고 있던 남식을 누군가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육감에 따라 자신을 지켜보는 그 시선을 찾았다. 남식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눈부신 미인이 지으며 그를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기도가 성모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생각하니까 놀라왔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실례하지만 지금 저를 보고 계신 겁니까? 아니면 병원에서 나오시는 겁니까?"
그녀는 대답도 없이 계속해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남식은 내친김에 그녀와 어떤 관계라도 맺고 싶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지금 웃고 계신걸 보니 분명히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슨 이유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저절로 나와요."
서울 말씨의 구슬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어이가 없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뭐가 말도 안 된다는 겁니까?"
"저도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쪽에서 하도 엉뚱한 기도로 성모님을 귀찮게 하고 있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어요. 그리고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도 생기더군요."
"그렇다면 처음부터 제 넋두리를 듣고 있었던 겁니까?"
"고의로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들리더군요. 실례였다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세요." "아닙니다. 어차피 오늘밤이면 이 세상도 끝이니까 어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 보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술이요?"
"날씨도 추운데 몸이라도 녹일 겸 한잔하자는 겁니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요?"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서는 그쪽이나 나나 막상막하 아닙니까?"
"그래요.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렇게 해요."
남식과 그녀는 코리아 극장 골목을 돌아 OB캐빈으로 들어갔다. 대낮부터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남식은 1000cc짜리 생맥주 두개를 들고 그녀가 앉아있는 곳으로 갔다.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잔을 부딪치며 오늘의 만남을 축하했다. 술이 들어가자 그녀는 남식이 묻기도 전에 자신이 성모상을 찾게된 경위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에서 무용을 한 송정아는 부동산으로 돈을 모은 강남 땅부자의 외동딸이라고 한다. 남부럽지 않은 재산과 달리 학벌이 변변찮은 그녀의 부모가 딸에게 거는 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전 후기 모두 실패한 그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초리를 견디다 못한 그녀가 무작정 찾아온 곳이 성모상이었던 것이다. 딸에 대한 기대가 컸던 부모에게 허탈감으로 보답을 하려니까 죄책감이 앞서 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쓸쓸하고 괴롭던 때에 남식의 넋두리를 듣게 되었고 말도 안돼는 기도를 듣게되어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우야 어떻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송정아를 만나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식은 그녀가 걱정이 되는지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정아씨!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면 무슨 궁리를 해야 할 것 아닙니까? 무작정 가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부모님도 걱정할 겁니다."
"남식씨 앞날이나 염려하세요. 오늘로 끝이라면서 제 걱정할 여유가 있어요?"
"저야 어차피 한밤중까지는 기다려야 하니까 걱정이 없지만 정아씨는 여자 아닙니까? 혼자서 헤매다 보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잘 모르겠어요. 지금은 서울을 탈출하고 싶은 심정뿐이에요. 어디를 가도 아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요. 생각 같아서는 제주도라도 가고 싶지만 혼자서 떠날려고 하니까 겁이 나고 그렇다고 이런 심경으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거든요."
"제주도에는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요?"
"아는 사람이 있으면 왜 그곳으로 가겠어요? 그곳에서도 저에게 손가락질을..."
"제주도에 가려면 여비가 꽤 많이 들텐데 준비도 없이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예요. 부모님께서 돈 하나만은 원 없이 주시거든요. 비행기를 타고 훌쩍 떠나고 싶은데 혼자라서 겁나는 것 뿐이예요."
"누군가 함께 가자고 하면 허락하시겠습니까? 정아씨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말입니까?"
"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더 좋아요. 부담 없이 여행을 가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먼 곳에서 찾을 것 없이 저랑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밤이면 세상 떠날 사람과는 싫어요. 제주도에서 자살이라도 하면 저는 완전히 끝장이거든요. 나중에 아빠가 알기라도 하시면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제 계획은 정아씨와 동행을 하고 나서 실행에 옮겨도 늦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몸인데 하루 이틀 늦는다고 달라지겠습니까? 다만 제 자금 사정이 술값과 여관비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것이 걱정입니다. 따라가서 부담만 되는 게 아닌지."
"돈걱정은 안 해도 돼요. 남식씨가 같이 가면 저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서울은 음침하고 답답하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벗어나고 싶어요."
"좋습니다. 정아씨가 허락하셨으니 시간 낭비 말고 당장 떠나도록 합시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 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뜨면 해 지기 전에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을겁니다."
"좋아요. 맥주는 다 마시고 가요."
"그럽시다. 아까운 술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니까 술은 비우고 갑시다."
두 사람은 술잔을 깨끗이 비우고 밖으로 나왔다. 초봄의 햇살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온 몸을 핥고 있었다. 퇴계로로 빠져나온 두 사람은 택시를 잡아타고 김포로 달렸다. 만난 지 몇 시간도 안된 그들은 몇 해를 사귀어온 연인들처럼 다정해 보였다. 택시 안에서는 제법 농담을 섞어가면서 제주 여행의 윤곽을 잡아가고 있었다. 도심을 빠져나온 차가 널찍한 김포 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몇 분내로 두 사람은 비행기에 오를 것이며 누구도 모를 두 사람만의 제주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국내선 청사에 이르자 택시가 멎었다.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두 사람은 흥분과 기쁨에 들떠 있었다. 남식이 비행기 표를 사들고 오면서 정아를 향해 자랑스럽게 흔들어 보였다. 마치 복권이라도 당첨된 표정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터질듯한 웃음을 던졌다. 얼마 전까지 인생의 패배자였던 그들이 제주 여행의 기대로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린 듯 하였다. 남식은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 성모상을 떠올렸다.
"성모님! 드디어 저의 소원을 들어주시는군요. 기왕 들어주실 바에야 제 계획이 변경되었으니 될 수 있으면 정아와 오랫동안 지낼 수 있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한여름의 개꿈처럼 허망하게 깨어나고 싶지 않으니 부디 분위기 있고 추억에 남을 일들을 성모께서 만들어 주시면 더 고맙겠습니다. Amen."
이번에는 기도의 끝에다가 아멘이라는 말까지 더하였다. 남식은 눈을 오래 감고 있으면 간구의 힘이 더해질 것으로 믿는지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 남식의 표정이 우스운 지 그녀가 한마디하였다. "남식씨 이번에는 무슨 소원을 빌었나요? 속 들여다보이는 기도는 아니겠지요?" 그녀의 지나가는 소리에 속마음이라도 들킨 듯 남식은 멋쩍게 웃고 말았다. 궁색한 변명을 찾으려고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다행스럽게 탑승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남식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탑승구로 걸어갔다. 그녀도 남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그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육중한 동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활주로 위를 천천히 몇 바퀴 돌더니 머리를 하늘로 치솟으며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마침내 공중으로 날기 시작했다. 김포 상공을 선회한 비행기가 남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구름을 뚫고 하늘 위로 오른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았다. 하기야 비행항로가 도심을 가로질러 가는 것이 아니었지만 막상 하늘에서 내려보는 지상의 것들은 남색이 위축되어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것 같았다. 마을로 생각되는 인구 집단도 하늘에서 보면 별 것이 아니었고 세상에서 잘났다고 하는 사람도 하늘에서 보면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남식은 그제야 대단한 진리라도 깨우친 듯 무릎을 치며 감탄하였다. 잘나고 못난 것은 지상에서 재는 짧은 잣대에 지나지 않는다.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하늘에서는 점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의미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대학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 세상을 마감할 정도로 비참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쟁을 이겨내고 그 관문을 통과하는 일은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한해에도 수 십만 명씩 양산되는 낙방 생들이 같은 시간에 죽음을 선택한다면 엄청난 사회현상이 벌어질 것은 뻔한 일이다. 결국 자신은 죽을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라는 위로가 남식의 머리를 맴돌았다. 차라리 죽을 결심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대단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식은 비로소 자신이 그려오던 대학의 허상을 깰 수 있었다. 화가를 꿈꾸는 그가 대학이라는 공간에 안주하려 했던 것이 죽기로 작정한 그 순간보다 처참하게 느껴졌다. 대학이 그림을 그려주는 것도 아닌데 한번의 실패로 죽음까지 생각했던 자신이 비굴하였던 것이다. 학교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창조해 내지 못하는 작가란 있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평범한 진리를 깨우친 순간 남식은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이제부터의 삶은 덤으로 받는 것이다. 죽기를 작정한 그때와 비교하면 그의 삶은 분명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성모상을 떠올리며 새로운 모든 것에 감사하였다. '성모님! 고맙습니다. 미련하고 생각 없는 저를 미쁘게 보시사 엄청난 진리를 깨우쳐 주셨으니 이제부터는 죽을힘을 다하여 열심히 살겠습니다. 예술의 의미와 더불어 삶의 진리를 일깨워주신 성모님께 제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방황하지 않고 살 것을 맹세합니다. 그런데 정아씨 만큼은 아직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 그 일은 제주에 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버릇없다 마시고 한번쯤 기회를 더 주시길 바랍니다.' 남식의 공상이 얼마나 빨리 하늘을 날고 있었는지 어느새 제주 공항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아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남식씨! 드디어 제주에 도착하나 봐요. 이렇게 가까운 줄 알았더라면 혼자서라도 올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남식씨가 곁에 있으니 쓸쓸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행입니다. 저는 정아씨가 다시 돌아가라 그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거든요."
"우수께 소리를 잘 하시는군요. 이렇게 동행해 주셔서 좌우간 고마와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각자 행동이라는 말입니까?""남식씨 임무는 사실 끝난 게 아닌가요? 제주까지 같이 가기로 했으니 원래의 계약은 도착 시점에 만료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좌우간 여러 가지로 고마왔어요. 답답하고 우울하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니 호텔에 도착하면 서울 부모님께 연락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며칠 쉬어 간다고 하면 부모님도 걱정하지 않으시겠지요. 대학은 내년에도 갈 수 있으니까 서울에서도 이해해 주실 거예요."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아씨를 믿고 왔는데 지금 와서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거야 제가 알 바 아니지요. 남식씨 말대로 여관에서 며칠 머물다가 목포로 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비행기 표는 제가 샀으니 여관비와 뱃삯은 남식씨가 해결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덕분에 머리 식히고 간다 생각하세요. 서울에서 저한테 술을 사주셨으니 제주 시내로 들어가면 술은 제가 사겠어요. 그러면 서로 빚진 것도 없어질 것이고 홀가분하게 헤어질 수 있을 거예요."
남식은 어안이 벙벙했다. 송정아와 동행했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다.그는 다시 한번 성모상을 떠올리며 지금의 기분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성모님! 너무 하십니다.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잉태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총각의 마음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겁니까? 죽는다고 했다가 살기로 한 줏대 없는 놈이라 괘씸해하시는 거라면 정말 해도 너무한 겁니다. 한번의 소원을 눈감고 넘어 가실 수는 없는 겁니까?' 남식의 탄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행기에서 바퀴가 빠져 나오는 가 싶더니 어느새 육중한 동체가 지상에 안착하고 있었다. 탑승객들이 비행기에서 빠져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도 그들의 물결에 섞여 공항 밖으로 빠져 나왔다. 공항을 빠져 나오자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정아와 남식은 택시를 타고 제주 호텔로 갔다. 호텔에 도착하자 남식을 로비에서 기다리게 한 정아는 데스크로 가서 방을 예약하고 있었다. 남식은 혹시나 하는 마지막 기대로 그녀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수속을 마친 그녀가 남식에게로 다가와서 약속대로 술을 사겠노라 했다. 남식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 호텔 라운지로 들어갔다. 그녀는 세련된 매너로 맥주와 안주를 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에 없던 침묵이흘렀다. 낮에 마셨던 술기운과 비행기의 여독 때문인지 그녀는 하품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던 맥주가 나오자 그것을 마시는 일도 다분히 사무적이었다. 그녀는 남식과 몇 잔의 맥주를 마신 후 피곤하다며 자리를 떴다. 모든 용건을 끝마친 그녀로서는 남식에게 더 이상 대꾸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홀로 남은 남식도 술을 몇 잔 더 들이킨 다음 밖으로 나왔다.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마셔서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서울에서 낙방소식을 확인했던 순간 죽음을 결심했던 것이 생각난다. 한밤중에 죽으리라 다짐한 바로 그 시간이 되었으나 살기로 마음을 돌린 이상 눈에 보이는 것이 생경하기만 하였다. 그는 또 한번 성모상을 떠올리면 지금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는 저의 진짜 여인이 나타나겠지요? 그때 가서는 총각의 마음도 헤아려 주셨으면 합니다. 성모님의 뜻이라면 제 여자를 만날 때까지 총각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남식은 밤하늘의 별을 보고 성모의 뜻을 알아차린 듯 멋쩍게 웃었다. 새삼 산다는 것이 재미있을 것 같았다. 남식은 계획에도 없던 제주 여행을 여유 있게 보내고 사흘째 되는 아침에 목포로 돌아갔다. 새로운 작품세계를 꿈꾸며 그의 예술은 환상과 가능으로 성장할 것이다.
강이 이야기를 마치자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단한 여자 편력기를 끌러 놓을 것 같더니 결국 불발로 끝난 총각 여행에 우리의 무겁고 침울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다. 강이 다음 주자를 지명하려는 듯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최선생이나 정선생도 강의 뜻에 따르려는 듯 나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나는 담배 한 대를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폣속 깊숙이 숨어있던 파란 연기가 하얀 색의 그것으로 변한 다음 허공으로 빠져 나온다. 나는 담배 연기에 기억을 실어 허공으로 뱉어내고 있었다.



넷.
1985년 여름 (夏行)
대학을 마치자 사회 적응기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건너온 나로서는 세상이 온통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글을 쓰지 않으면 못 배기는 내가 막상 미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대체 감이 잡히질 않았다. 영문학을 전공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은 그저 그림의 떡이라는 생각만 하게 된 것이다. 행여 글을 쓴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글을 쓰지 않으면 쌓여 가는 고독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서울에서 자란 덕택에 뉴욕에 떨어진 이후에도 도시의 중압감은 그런대로 견디어 냈지만 이십의 중턱을 넘긴 젊음이 감당할 절대적 고립은 생각만 해도 끔직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고독의 순간을 벗어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침묵의 그림자를 걷어 버리는 것이었다. 친구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의 넋두리를 들어 줄 사람은 한 둘 정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전화번호를 뒤지며 그리운 이름들을 읽어 내려갔다. 무작정 흘러가던 시선이 낯익은 이름을 발견한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유인숙. 그녀는 나의 삶을 돌려놓은 아름다운 추억의 여인이었다. 이성의 속삭임과 망설임 가운데 그녀에게 향한 그리움의 신호를 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의 주저함 끝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초의 교신이 이루어진 후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를 기대했던 것과 달리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공연한 짓을 한 것이 후회스러웠지만 그래도 전화를 한 이상 그녀의 소식이 궁금하였기 때문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숙을 찾았다.
"여보세요! 저는 한정민이라고 하는데 유인숙씨 부탁합니다."
"지금 집에 없습니다. 메모는 남기겠지만 저녁 때 다시 한번 걸어 보시지요."
"알겠습니다. 저녁 시간에 다시 걸도록 하겠습니다."
인숙과 통화를 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도리어 다행이었다. 막상 준비도 못한 상태에서 그녀와 교신이 이루어 졌다면 헛소리로 끝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는 긴장감으로 침묵의 그림자는 이미 걷힌 상태였다. 설렘과 지난 추억의 그림들이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 때 나는 두 번째의 교신을 시도하였다. 두세 번의 신호가 가더니 상냥한 목소리가 전화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삼 년간 끊겼던 추억의 선을 잇기 시작했다. 79년에 미국으로 떠난 인숙을 삼 년 전 한국에서 만난 뒤로는 사실상 우리는 철저한 타인이 되어 서로의 삶에 관여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LA에 있었고 나는 NY에 살고 있었으니 지리적으로도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목소리를 확인하자 반가운 나머지 당장 만나자고 하였다. 그녀가 살고 있는 근처에 Manhattan 이라는 곳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뉴욕에서 전화를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번 가겠노라대답하였다. 우리는 지난 세월의 흔적을 다시 짜마추느라고 세시간 동안이나 전화를 붙들고 있었다. 최초의 통화치고는 짧지 않은 시간을 서로 나누었다. 인숙으로부터 전화가 계속 오고 만만치 않은 전화 Bill을 다달이 받다보니 목소리로 서로를 확인하는 것은 시간과 정력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로 날아 갈 것을 결심하고 인숙에게 그 소식을 알려 주었다. 8월 20일. 나는 Newark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이 주는 흥분은 감출 수 있었지만 인숙을 찾아가는 새로운 느낌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한 시간이 한없이 지루한 까닭은 그녀의 손짓이 대륙을 가로질러 분명하게 전해오기 때문이다. 마침내 탑승 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늘 한 가운데서 두 눈을 감고 인숙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인숙이 나를 부르는 것이 분명하였다. 몇천 마일의 거리가 우리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현실의 격리가 도리어 느낌을 분명히 해 주었다. 다섯 시간의 비행 끝에 LA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인숙이 사람 사이를 헤치고 나오면서 나를 찾았다. 나는 마음속에 감춘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낼 용기가 없었다. 전화를 통해서는 그렇게 주절대던 소리들이 그녀를 보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인숙은 나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나에게 달려와 몸을 안겼다. 우리는 그녀가 몰고 온 Sports Car를 타고 공항에서 가까운 Pub으로 갔다. 시원한 맥주 거품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간 다음에야 현실감을 찾을 수 있었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나는 공항에서 나누지 못한 재회의 변을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인숙이 보고 싶었어. 막상 얼굴을 대하게 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마음속에는 산처럼 쌓여있는 말도 순간적으로 벙어리가 되니 소용이 없었던 거야.""정민씨 새삼스럽게 왜 그래?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말이야. 앞으로 둘만의 여행을 떠나게 되면 지겹도록 이야기를 나눌텐데 신경 쓸것 없어."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그녀가 고마왔다. 간단한 대화로 회포를 푼 우리는 그녀가 예약해 놓은 Motel로 갔다. 인숙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Motel이라서 그녀는 나를 쉬게 하고 이내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인숙은 다음 날의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세심함도 보였다. 인숙이 아침을 열며 찾아온 시간은 다음날 8시였다. 동부 시간으로 보면 아직도 새벽 5시였기 때문에 무거운 눈을 비비며 그녀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Coffee와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해 와서 내게 권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잠을 깨우기로 하였고 인숙은 내가 아침을 먹는 동안 오늘의 일정과 계획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녀의 준비성과 세심함이 돋보였다. 아침을 먹고 샤워로 몸을 적시고 나니 어느 정도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싱그런 아침 바람이 우리를 만지고 지나갈 때 우리는 차에 올랐다. 인숙은 자신이 먼저 몰겠다며 휠을 잡았다. 도심을 빠져나와 시원한 태평양 해안도로를 달릴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나를 집어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끝없는 감탄을 뱉어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숙은 나의 반응이 의외인 듯 운전을 하면서도 몇 번씩이나 곁눈질을 하였다. 인숙을 찾아오길 잘했다는 자족감에 도취하여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회색도시의 인조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 모두 인숙의 덕이라는 생각에 그녀가 고마왔다. 끝없는 자연의 신비에 취해 열 네 시간을 운전한 다음 Camel이라는 도시에서 밤을 맞아 하루를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17마일스라는 공원에서 오전의 시간을 보내었고 마침내 오후 늦게 금문교와 언덕으로 유명한 Sanfrancisco에 들어갔다. 도심으로 들어올 때 귀에 익은 '사랑을 남긴 샌프란시스코'가 흘러나와 비로소 낭만의 도시에 인숙과 함께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물 하나에도 기막힌 사연이 있을 것 같고 거리를 지나가는 젊은 커플의 미소 속에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 흐르고 있었다. 도시의 북단에 바다를 가로질러 우뚝 솟은 금문교가 우리를 발견하고 마치 두 팔을 벌리며 안으려 하듯 반갑게 맞아 주었다. 태평양의 가슴에 안겨 얼마 전에 떠나온 고국을 떠올리니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서울 소식에 귀를 세우며 과거와 연을 맺으려했던 나의 몸부림에도 자연은 마다 않고 맞아주었다. 한나절인데도 바다로부터 올라오는 자욱한 물안개가 교각의 나신을 신비스럽게 가리고 있어 나도 모르게 바다 속으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죽음을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이 궂이 금문교를 찾는 비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진 절경에 도취되어 넋을 잃고 있었다. 인숙이 내 팔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대단하지 않아? 정민씨의 기대보다는 못할지 모르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을 한 인간들에게 모든 크레딧을 줘야 할 것 같아."
"인숙이 덕분에 귀한 구경한 것이 고마워. 관념에 치우치기 쉬운 나 같은 사람에게 현상의 미학을 일깨워 주었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하지?"
"아직도 과장되게 말하는 것을 보면 정민씨는 솔직하지 않아. 그냥 쉽게 말하면 되잖아. 단순한 감탄사나 표정으로도 마음을 대신 할 수 있단 말이야."
"무슨 뜻이지?"
"사랑이라고 말하면 그만 아닐까?"
"......"
사랑? 나는 인숙의 도전적 발언에 말을 잃고 말았다. 감성을 이성으로 이해하려 했던 지난날의 실수가 채 아물기도 전에 한방 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늘 그랬는지 모른다. 솔직한 표현을 아끼다 보니 언제나 미온적이고 우유부단하게 보였던 나의 행동을 인숙은 진작부터 식상이 났을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속마음을 보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인숙에게 고백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이 지난 후에야 가버린 시간들을 안타까워하며 홀로 몸부림을 쳤던 것에 지나지 않았다. 사랑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녀를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던 나의 입장에서는 인숙을 두 번이나 떠나보낸 셈이다. 이제 그녀가 당당히 내 앞으로 나와서 마지막의 기회를 주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의 선택으로 내게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뉴욕에서의 고통의 나날이 그녀를 떠올리게 했고 나의 얄팍한 속셈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사랑으로 이해해 준 그녀에게 진심을 보이지 못하는 것은 나도 설명할 수 없었다. 글을 쓴다는 허울로 나를 숨기기에 급급했던 과거에서 한치도 나가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인정하는 세계는 가공의 것도 아니었건만 정작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여지없는 나만의 공간이었다.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다 보니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고 결국은 폐쇄적일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글을 쓰는 행위도 철저한 독백이었고 남 모르는 웃음으로 쾌감을 느껴온 것이었다. 글쟁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외부로 나타난 생각이 없으니 사람들도 나를 모를 수밖에 없었다. 나를 아는 사람으로부터는 재주 있다는 위로를 받기는 하지만 그것도 나를 만족할 수없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적개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현실과 대결하여 머리라도 깨질 각오라면 싸워 볼만도 하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런 독한 마음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며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진작에 체념을 하였다면 땀을 흘리며 육체의 대가에 따라 살았겠지만 순간마다 고개를 드는 반란의 깃발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곤 한다. 지금 그녀가 나를 뒤흔들고 있다. 사랑의 칼끝으로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이다. 거짓의 가면을 벗어 던지라는 것이다. 편협한 사고를 깨고 세상을 안으라고 했다. 그리고 사랑의 느낌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녀가 던진 아픔의 언어를 몇 번이나 되씹으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참, 처음 전화했을 때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였지?"
"정민씨가 점점 솔직해 지는 것 같아 흥미롭군! 나랑 굉장히 가까운 남자야."
"그랬었군... 그런데 나랑 이곳까지 여행을 온 이유는 동정 때문이었어?"
"정민씨도 질투를 하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관심이 있었나봐?"
"인숙이가 나와 그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것 같아 불쾌하다는 거야."
"저울질을 왜 해? 내 마음은 항상 하나였는데 정민씨는 몰랐나봐. 그렇지?"
"그렇다면 나는 뭐지? 들러리로 왔단 말인가?"
"점점 재미있어 지네. 정민씨가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이 처음인 것 같아. 글쓰는 사람들은 고고한 줄 알았는데 사실 별것 아니네. 정말 내게 관심이 있었어?"
"사람 약올리는 걸 좋아하는 군!"
"감정을 아끼려 하지마. 한 마디면 되는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어려워 하는 거야!"
"무슨 뜻이지? 내가 뭘 아낀다고 그러는 거야!"
"정민씨는 내가 바라는 답을 한번도 한 적이 없어! 사랑한다고 하면 그만 아니야?"
"사랑한다고 하면 지금의 사태가 변하는 거야?"
"정민씨는 조건이 너무 많아. 그래가지고 무슨 글을 쓰겠어?"
인숙은 내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미온적인 태도에 그녀는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었다. 인숙의 말대로 조건 없는 한마디로 충분하였다. 아무 것도 없는 내게 인숙은 전부였으면서도 그것을 보이지 못하는 내 자신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인숙이 나를 골탕먹이려 할지라도 거짓을 붙들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처음으로 마음의 소리를 하고 싶었다. 인숙이 나를 떠나더라도 모든 것이 그녀의 뜻이라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서울과 이곳에서의 기억들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순수하고 거짓 없는 날들이었다. 추억을 잃는 것은 안타까웠지만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
"지금 뭐라고 했어? 정민씨의 말이 진심이라면 다시 한번 말해줄 수 있지? 태평양을 향해서 '인숙을 사랑한다'고 외친 다음 정식으로 프로포즈를 해봐."
나는 잠시 동안 머뭇거렸으나 이내 마술이라도 걸린 듯 그녀가 시키는 데로 했다.
"나는 유인숙을 사랑한다. 죽음이라도 두려워 않고 너를 위해 한평생 살리라."
"정민씨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로 하겠어요."
"인숙에게는 냉정한 구석이 있군! 내 사랑을 받아들이면 그 남자는..."
"그러면 정민씨를 택하지 말라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그 남자가 누구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거지?"
"밝히지 않는 게 아니야. 정민씨가 오해하고 있는 것뿐이지."
"오해?"
"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내 동생이야. 동생을 생각했으니 그게 오해가 아니고 뭐야? 덕분에 정민씨로부터 진심을 알아내었으니 고마운 일이지 뭐!"
"내가 인숙에게 당한 셈이군."
"좋은 경험했지 뭐. 진실을 숨기려하면 언제나 그런 법이야. 운이 좋아서 임자를 만나면 이해해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뒷전에서 헛물켜는 것도 몰라?"
나는 인숙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 이런 행운이 없었다면 그녀를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며 인숙이 나를 기다려 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만남에는 운명의 손길이 작용했겠지만 우리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인숙의 노력 때문이었다. 나는 말없이 기다려준 인숙이 너무 고마와 그녀를 힘있게 끌어안았다. 때마침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만지고 지나갔다. 눈앞에 보이는 자연은 환상적이었다. 인숙과 일생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벅차기만 하였다. 우리는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를 끌어안은 채 한참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이 순간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후회할 것이 없었다. 나의 오랜 방황을 그녀와 함께 끝낼 수 있는 것이 감격스럽기만 하였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환희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인숙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일부러 숨길 생각은 없었다. 볼을 타고 내리던 눈물을 그녀가 보았는지 인숙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나를 참된 사랑으로 안아주고 있었다.'사랑하는 인숙. 아무 불만 없이 기나긴 세월을 격려와 깊은 사랑으로 기다려준 당신. 사랑으로 보답하리라.' 금문교의 붉은 색 교각을 더 붉게 물들이며 바다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둥근 태양이 절정이었다. 너무도 아름다운 석양이 우리 앞에서 꺼져가고 있었다. 금문교의 사랑은 기억의 세포에 각인 되고 있었다. 내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준 금문교 기행은 이후의 삶에 증거의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인생의 심연으로 쳐 박혀들 때마다 삶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인숙과 함께 했던 바로 그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내의 Motel에서 하루를 보내었다. 서로의 벽을 허물고 진실을 확인한 우리는 가는 곳마다 도시가 주는 낭만과 사랑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Cable Car로 도시의 젖무덤을 핥고 지날 때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의 전설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감춤 없는 행동으로 아이가 되었기 때문에 인숙도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을 만들 수 있었다. 도시의 전설을 만들기 나흘째 되는 날 우리는 천사의 도시로 다시 떠났다. 나는 아쉬움과 다시 올 그날을 기약하며 몇 자의 기록을 남긴다.

Sanfrancisco의 전설
서로 다른 거리에서 타인으로 살아온 우리가 이제는 하나가 됩니다.
세월의 흉터까지 눈물로 씻어 주시는 그대를 말없이 사랑하렵니다.
죽음 기다리는 그 날일지언정 두렴없이 그대 손잡으렵니다.
1985 여름.


나의 여행기가 끝나자 강이 부러운 듯 쳐다보았다. 그의 독신 생활과 비교하면 나의 결혼생활이 꿈처럼 들렸을지 모른다. 최선생과 정화백은 나와 함께 여행이라도 한 듯 깊은 생각에 잠겨 젊은 한 쌍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정화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하였다.
"아름다운 이야기군. 자네의 글처럼 예쁜 구석이 많아. 그래 결혼생활은 만족한가?"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 불평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랑할 필요가 없었다. 정화백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띤다. 그의 미소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었으나 자신의 차례가 된 것을 알고 있는 정화백이라 자연스럽게 그의 무용담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다 섯.
1991년 가을 (秋行)
개방의 물결을 타고 열리기 시작한 러시아의 문호는 서방 예술인들을 향해 빠른 손짓을 하고 있었다. 오십을 갓 넘긴 정승찬 화백이 미술가협회 소속 회원으로 동구 스케치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파리에서 5년을 살았던 그는 유럽의 향수를 느끼며 뉴욕에서 고독한 작업을 이십 여 년 넘게 해오던 참이었다. 러시아는 서구자본 유치를 위해 혈안이었고 기회가 닿는 대로 달러를 긁어모으려 안간힘 을 쓰고 있었다. 이번 여행은 뉴욕 경제인협회와 미술가 협회의 공동 주관으로 20명이 넘는 규모의 일행을 모집하여 떠나게된 것이다. 10월 8일 뉴욕을 떠나 동구 유럽의 고색창연한 문화를 섭렵하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10월 중순이 되어서였다. 미국의 날씨만 생각하고 별 다른 준비를 하지 못한 정화백은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실내를 전전긍긍하며 어두운 물상을 종이에 옮겨 놓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10월 중순이라고 하지만 코끝이 시리고 손이 어는 날씨에 야외의 경치를 찾아 낯선 러시아를 방황하는 일은 무모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기만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좋은 경험으로 여기며 산하를 찾아 다녔겠지만 그것도 아닌 까닭에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스크바의 거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로운 성격의 그가 호텔 구석에서 이국의 정취를 상상으로 대신해야 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술이라기보다는 알콜 그 자체에 가까운 보드카를 친구로 여기며 밤마다 음침한 도시 모스크바를 익혀가는 것이 그의 일과 전부였다. 같은 방을 쓰는 경협 소속 김상태 사장은 미술은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공동의 화제도 없는 편이었다. 그의 관심은 사업과 종교로 국한되었고 모 교회 장로인 그와 윤리와 규율을 예술의 적으로 여기는 정화백과는 서로 함께 어울릴 수 없는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한 방을 쓰면서도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다. 정화백이 술로 밤을 지내는 것이 고작이라면 김사장은 낮 동안 수집한 자료를 분석하고 잠들기 전에 기도로 하루를 정리하는 규칙적인 생활의 소유자였다. 정화백의 입장에서는 김사장의 행동이 거부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그날도 정화백은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으며 김사장은 예의 기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던 참이었다. 술기운이 제법 돌 때 정화백이 느닷없이 김사장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김사장! 당신은 날마다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하시는데, 도대체 당신이 믿고 있는 그 신이 당신에게 무어라고 합디까?"
"정화백! 약주가 과하신 것 같으니 그만 하시지요. 내일은 아침부터 산업 시찰을 하기로 되어있고 여러 가지로 바쁜 일정이 짷여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김사장께서 어느 교회의 장로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러는건데 깊은 진리를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일깨워주십사 하는 겁니다. 만민의 복음이라고 하는 기독교를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모질게 말을 자르지는 않으시겠지요?"
"정화백께서 무슨 이유로 이 여행에 동참하셨는지 그것은 제가 알 바 아닙니다만 빈정거리는 말투로 종교를 운운하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빈정대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술은 마셨지만 진리의..."
"정화백께서 복음의 진리를 알기 원하신다면 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캐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제가 여행 떠날 때마다 갖고 다니는 성경책입니다.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주님의 사랑을 쉽게 말씀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깊은 진리가 이 안에 모두 있으니 정독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뉴욕에 도착해서 연락 주시면 제가 섬기는 교회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우리 목사님을 만나 뵈면 신앙적으로 많은 도움이 될 걸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간직하십시오. 놀라운 진리가 그 안에 있습니다."
김사장은 손떼가 뭍은 성경책을 정화백의 손에 쥐어 주었다. 술김에 던진 말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니 급기야는 정화백에게 되돌아 온 셈이다. 그는 김사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비를 걸려고 했던 정화백의 행동이 김사장의 온유한 미소로 순식간에 길을 잃고 만다. 김사장은 이야기를 마치자 모든 용무를 끝내기라도 한 듯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자신의 침대 쪽에 있는 스탠드 라이트를 끄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정화백은 코를 골고 있는 김사장을 말없이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심사가 상하였는지 성경책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있는 보드카를 들이키려다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아직 10 시밖에 안되었으니 스탠드 바에 가서 술을 마셔도 좋을 시간이었다.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술꾼 중에는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들과 한잔을 더하는 것이 이 방의 공기보다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Bar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서 그들과 합류하는 것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리를 잡고 나서 보드카를 시켰다. 바텐더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드카를 딸아 주었다. 술잔을 받아든 정화백은 단숨에 술을 입안으로 부어넣었다. 웬만해서는 취기를 느끼지 않는 정화백인지라 한잔씩 마시려던 생각을 바꾸어 병째로 오더를 했다. 그는 지갑을 꺼내어 100달러 짜리 한 장을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백불 짜리 돈을 본 바텐더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보드카 병을 정화백 앞에 놓았다. 바텐더가 서투른 영어로 정화백에게 무엇인가 속삭이고 있었다. 단돈 50불로 러시아 여인과 멋진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십 여 년을 독신으로 살아온 정화백에게 바텐더가 던지는 유혹을 물리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는 아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유혹의 미끼를 던진 바텐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백의 뜻을 파악한 그는 실내의 한 구석을 턱으로 가리켰다. 창백한 얼굴의 러시아 여인이 정화백을 향해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앉아 있었다. 날씬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균형 잡힌 몸매의 그녀는 검은색 옷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다. 신체적으로 왜소한 정화백은 균형 잡힌 여인을 볼 때마다 거침없는 상상의 나래를 펴곤한다. 여자에게 위압감을 느끼는 동시에 정복욕이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성사시킨 바텐더에게 20불을 쥐어준 다음 술병을 들고 그녀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호흡이 가빠지는 흥분으로 그녀 앞에 섰다. 정화백이 눈짓으로 그녀에게 동의를 구하자 그녀는 눈을 아래로 깔며 그의 합석을 허락하였다. 그녀의 미소에는 백치의 순진함이 있었고 수줍은 여인의 비밀이 뭍어났다. 정화백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장밋빛 인생이라고 하더니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소리였구나. 그래 너 로소케 여인아! 오늘 기억에 남을 사랑을 심어주마. 네 남편이 너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꿈에서도 잊지 않도록 해주마. 러시아의 땅에, 백야의 도시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해주는 너 고맙구나.' 그는 여유를 보이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정화백은 보드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다음 러시아 여인에게 술을 권했다. 그녀는 정화백이 건넨 술잔을 단숨에 비운 후 그것을 다시 정화백에게 돌려주었다. 정화백은 그녀가 따라주는 술잔을 바라보며 세상을 전부 소유한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입술에 술을 적시며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상상해 보았다. '술을 마시고 나면 11시를 넘기겠지. 이 여자를 상대하자면 어는 정도의 기력이 남아 있어야 할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방으로 돌아가면 김사장이 깰 테고 내국인의 호텔 투숙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돈 몇 푼 쥐어주고 어떻게 알아서 하라고 해야지. 50불이면 된다고 했으니 100불을 건네 주면 그녀도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하겠지? 그래! 이 여자를 취하게 한 다음 못이기는 척하며 그녀의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그 다음은 살갗을 부딪기며 육의 향연을 벌이는 거야. 어차피 산업시찰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니까 오후 늦게 돌아가도 의심하는 사람은 없겠지. 김사장이 뭐라고 하겠지만 그게 그의 천성이니까 나무랄 일도 아니지. 그래! 오늘은 광란의 밤을 즐겨보는 거야!'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았다. 얼른 생각해 보아도 그럴듯하게 앞뒤가 맞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병을 비워갔다. 정화백의 속마음을 읽고있는 그녀도 수줍음을 보이거나 소극적으로 굴지는 않았다. 마침내 보드카 병의 바닥이 드러났다. 어둠을 뚫고 지나는 두 사람의 눈빛은 욕망으로 끓고 있었다. 그들은 오랜 술친구가 되어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의 일정을 향해 움직였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모든 일이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러시아 여인은 정화백의 가슴에 자신을 맡기며 자신의 술 취해 있는 상태를 노골적으로 알렸다. 정화백은 한 팔로 그녀를 감쌓았다. 손바닥에 육체의 일부가 느껴졌다. 그녀의 탄력있는 젖무덤이 정화백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그는 야릇한 흥분에 쌓여 뜨거운 호흡을 내뱉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정화백도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취해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호텔을 빠져나와 택시를 탔다. 운전사가 목적지를 물어오자 그녀가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간신히 대꾸하였다. 정화백은 그 와중에서도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낯선 땅에서 말도 안통하고 더구나 목적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녀의 한마디는 마법의 주문처럼 신통하기만 하였다. 택시는 도심의 번화가를 빠져나와 시의 외곽을 달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의 생활. 보통 사람의 집들. 보통 사람의 모습. 러시아 서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는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쏟아지는 졸음을 억지로 참아가며 택시로 지나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밤은 깊은 시간의 늪으로 빠져가고 있었고 어둠은 희미한 불빛까지 잠재우는 칠흑 그대로였다. 그는 빛이라는 자연 광을 떠올리며 작품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죽음이 따로 없구나. 빛이 없는 생활 속에는 희망도 없을 것이며 육의 노동도 어둠 속에 묻혀 버려 죽음의 시간이 되고 마는 것이구나. 공산주의의 관념적 사상보다는 생계를 이어가는 현실의 문제가 삶이 아닌가? 그래서 나 같은 자본주의 산물도 이념과 상관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아, 영원한 예술이여! 예술이여 영원할 지어다. 사랑이여 찬란할 지어다.' 정화백은 화가라는 자신의 직업이 오늘처럼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택시는 한적한 주택가를 벗어나 외딴 공장지대를 돌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며 달리던 택시가 폐허의 건물들이 늘어선 외딴 곳에 이르자 멈추었다. 정화백은 러시아 여인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풀린 눈으로 바깥을 한번 훑어보고 나서는 턱을 들어 위치를 알려주었다. 택시는 구석진 곳으로 얼마를 더 가더니 한적한 곳에 이르러 멈추었다. 드디어 목적지에 이른 것이다. 정화백은 흥분을 감추며 택시 기사에게 돈을 주고 여인을 부축하여 차에서 내렸다. 택시가 멀어지자 그녀는 언제 술에 취했는가 쉽게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 인적 없는 주위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건장한 청년 둘이 어둠을 헤치고 나타났다. 한 놈이 정화백의 복부를 갈겼다.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받은 정화백이 배를 움켜쥐고 땅에 엎드리자 다른 한 놈은 미리 준비했던 노끈으로 정화백의 두 발을 묶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숨막히는 순간이었다. 힘이나 숫자로 봐도 저항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는 저들이 시키는 데로 순순히 따라갔다. 그들은 정화백을 짐짝 다루듯 하며 다 쓰러져가는 건물의 지하실로 그를 밀어 넣었다. 허름한 지하실에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계획적으로 자신을 유인한 것이 분명했다. 그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러시아 여인이 그들 중 두목으로 보이는 놈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인다. 두목으로 보이는 자가 정화백의 몸을 수색하라고 지시하는 것 같았다. 험상궂은 놈이 정화백을 발로 차서 쓰러뜨린 다음 돈지갑을 꺼내어 두목에게 주었다. 놈은 지갑 속의 돈을 확인한 후 아주 흡족하여 러시아 여인을 끌어안고 키스를 여러 번 했다. 잠시 후 그들은 정화백만 남기고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주지 육림을 상상하며 러시아 여인을 따라왔던 자신이 한심하기만 하였다. 낯선 땅에서 버려진 짐짝처럼 의미 없이 자신의 최후를 마감하는 것이 서글펐다. 술이 확 깨었다. 쉬흔 해를 살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빠른 그림을 그리며 흘러갔다. 이혼한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바로 몇 시간 전 김사장이 준 손떼 묻은 성경책도 떠올랐다. 순간 두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삶이 먼지처럼 사라지고 있었고 지금까지 걸어온 미술세계가 한숨에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적의 가능성을 버릴 수 없었다. 일전에 점장이가 팔십 수를 누릴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온갖 잡생각과 과거의 추억 그리고 알 수 없는 절대자에 대한 소원이 정화백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는 또 한번 김사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의 하나님에 대해 항의를 하듯 지껄이기 시작했다. "김사장이 믿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 당신이 처음부터 내 행동을 지켜보셨다면 진작에 말리지 않고 뭘 하셨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이런 식으로 더 비참하게 만들어야 하겠습니까? 당신은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술로 사람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것이 나의 직업입니다. 그래서 가정을 마다 않고 이국에서의 고독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을 떠올리고 추함 속에서 미를 탄생시키는 것이 당신과 나의 일이 아닙니까? 당신이 창조한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그들을 물로 심판할 수밖에 없었던 당신의 마음을 나는 이해합니다. 화가에게 실패한 작품은 있을지라도 생명을 앗아가는 잔인성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괴로워하며 슬픔을 감수하는 것으로 끝내는 버릇이 있지요. 제가 지금 뱉어내는 말들로 당신을 추궁하려는 것이 아님을 당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어처구니없게 죽을 수는 없습니다. 김사장을 통해 한번의 손길을 뻗쳤다면 끝까지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예술가를 박해하는 신을 보통 사람들이 따르지는 않을 겁니다. 행여 그들이 당신을 따른다 해도 겁에 질린 수동적 믿음이지 결코 능동적 신앙은 아닐 겁니다. 제게 한번의 기회를 더 주신다면 열심히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그림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알릴 것이며 오늘의 일을 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허무맹랑한 소리라면 더 이상 듣지 않으셔도 상관없지만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속는 셈치고 마지막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부터는 나만 고집하지 않겠습니다. 소외되고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좋은 일도 하겠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죽을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버젓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는 신도들보다는 나 같은 죄인을 한번 써 보십시오. 당신이 귀를 막고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은총으로 저를 구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정화백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한 셈이다. 절규와 갈등의 순간이 지나자 그 동안 참아왔던 피로가 한순간에 몰려왔다. 눈을 감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잠을 청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다. 그는 어느새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였다. 꿈결인데도 사람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자신을 깨우고 있었다. 그는 정화백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몸을 흔들어 깨웠다. 정화백은 침침한 눈을 비비며 눈을 떴다. 지하실의 창문을 통하여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벌써 아침이 된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머리가 으깨어지는 두통 속에서도 그를 깨운 자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정화백을 지하실로 밀어 넣은 장본인들이었다. 한 놈이 노끈을 풀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두 팔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었지만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혹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아니,죽일 생각이었다면 어제 밤에 죽일 수 있었는데 아침까지 기다릴 이유가 뭐지?' 정화백은 불안한 생각을 하면서도 양손을 번갈아 가며 가볍게 문질렀다. 얼핏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었다. 그 상황에서도 단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이 신기했다. 그들이 정화백에게 뭐라고 지껄였지만 죽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화백의 지갑을 돌려주고 음침한 지하실에서 나가도 좋다는 듯 손으로 계단 쪽을 가리키며 정화백의 등을 떠밀었다. 죽음 직전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막상 지갑을 돌려 받았지만 호텔로 돌아갈 차비가 없었다. 정화백은 두목으로 보이는 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정화백의 담력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돈을 꺼내어 정화백의 손에 쥐어줬다. 정화백이 밖으로 나와 보니 미리 준비해 둔 택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화백이 묶고있는 호텔을 택시기사에게 알려주는 친절(?)도 베풀어주면서 정화백을 돌려보내었다. 정화백이 호텔로 돌아온 때는 11시가 지나서였다. 그가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김상태 사장이 정화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호텔 방에 들어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오자 김사장이 정화백에게 그 동안의 경위를 설명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화백께서 안 보이더군요. 성경책은 침대 위에 나뒹굴고 술병은 간밤에 있었던 그대로 테이블 위에 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정화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내를 담당하는 한국계 러시아인에게 전화를 했지요. 그분 이야기가 납치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정선생을 찾아 달라고 부탁을 했지요. 그분이 KGB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정선생을 다시 뵙게 된 겁니다.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스탠드 바의 종업원들과 마피아들이 공공연히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안내인의 말은 KGB도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원래 내국인은 호텔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고 하는데 권력의 비호 없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정도 차질..."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일정이야 다시 조정하면 그만이지만 정선생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같은 낭패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만하니 다행입니다."
"김사장님 덕택에 목숨을 건지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달리은혜에 보답할 것도 없고... 뉴욕의 연락처를 주시면 돌아가서 제 작품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지 없습니다. 그보다 연락을 주시면 제가 섬기는 교회에 한번 모시고 가고 싶습니다. 정선생께서 반대를 안 하시면 말입니다."
"......"
"이번 사건 속에는 반드시 숨겨진 뜻이 있을 겁니다. 또 이번 경험으로 정화백님의 작품과 삶에 새로운 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사장님 고맙습니다. 제가 피곤해서 눈 좀 부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반가운 나머지 그만..."
정화백은 곧장 침대로 들어갔다. 그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두 눈을 감았다. 지난 밤에 있었던 악몽의 순간들을 다시 돌아보며 혼잣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당신께 감사 드립니다. 죽는 그날까지 예술가로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실족치 않고 남들을 돌아보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당신의 뜻을 이해합니다."
그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썹을 덮으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인생은 꿈일지도 모른다. 정승찬의 삶이 새롭게 변한 후로 그는 남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독선을 고집하던 과거가 바람과 더불어 날아간 것이다.


정화백의 이야기가 끝나자 우리 모두는 과거의 여행에서 돌아와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맥주로 건배를 했다. 이제는 각자의 둥지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이다. 술이 많이 취한 최선생은 정화백의 화실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고 강과 나는 비 내리는 새벽길로 나왔다. Williams Bridge를 건너면서 나는 금문교를 떠올려 보았다. 새벽까지 이어온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나누어준 인생을 금문교 위에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새벽 비는 소리 없이 세상을 적시고 있었고 우리는 오늘도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의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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