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9일 월요일

빛과 그림자

하 나.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인생은 제대로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있어 시간 낭비를 한 기간은 대학 문을 제때에 들어가지 못한 한해동안의 재수 시절 뿐 그런대로 남들과 보조를 맞추며 빠른 발걸음을 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던 해만 하더라도 가을 졸업을 마친 뒤 잠복기를 거치지 않고 미련 없이 한국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서 처음 만난 그와의 관계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지금까지 비슷한 유형을 거듭하면서 끈적끈적한 인연을 맺으며 계속 되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으로 직행하였고 그는 한해를 방랑하면서 대학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우리 사이에는 일년이라는 생활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방해가 되던 한 살 차이의 나이도 결국 해가 거듭되면서 하등의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우리는 친형제처럼 함께 다녔으며 친구들은 우리의 관계를 빛과 그림자라는 표현을 하며 질시와 부러움이 섞인 야릇한 시선으로 주시하곤 하였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계획을 처음 밝혔을 때 나는 그의 생각에 전염되어 이내 같은 뜻이 있다고 답하였다. 뉴욕에 큰형이 있는 나로서는 그렇지 않아도 졸업을 마치고 유학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로 미국까지 가려하는지는 사실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미국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었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스스로 피하려 하였기 때문에 구태여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는 서울을 떠나게 되었고 미국 연락처도 알려주지 않은 채 우리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게 되는 줄 만 알았다. 1985년 9월 1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의 달력에 그의 탈출이 기록되어있다. 나는 그해 말에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아 대학원의 고급 실업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미국의 신학기는 9월부터 시작하는 까닭에 형의 신세를 지며 몇 달 동안을 편하게 보낼 생각으로 미국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일주일도 안되어 산산 조각나는 경험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집안에서는 큰형의 목소리가 제일이었고 그의 생각을 반대하다가는 그나마 어렵게 시작한 미국유학의 꿈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는 것이다. 나는 큰형의 복제품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기준에 의해 새롭게 조련되어 가야만 했다. 스스로 자수성가한 것에 만족하여 미국에서 성공한 유일한 한국인이라도 된 듯 나를 그의 틀에 맞추어 가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우리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싫든 좋든 큰형이 시키는 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큰형은 대학원 개강이 9월이기를 진작부터 바라던 사람처럼 동생인 나를 개조하는데 전력투구를 하였다. 나는 큰형이 경영하는 야채가게에서 지배인 일을 맡아보게 되었고 우리는 형제이면서도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형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의 기분에 맞추어 가는 것은 사실 질식할 정도로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몇 번이나 가게를 뛰쳐나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도 했지만 빈손으로 실패자가 되어 귀국한다는 것이 자존심에 걸려 중도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미국으로 떠난 그의 소식도 궁금하였기 때문에 과거를 뭍고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내가 머문 곳은 뉴욕의 꽃이라고 하는 맨하탄 이었지만 실상은 말이 아니었다. 악착같이 돈을 모은 형은 아이가 둘이나 되면서도 방 하나 짜리 아파트에 만족하며 돈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거하는 공간은 응접실로 감지덕지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것도 겨우 밤이나 되어서 침실로 들어가는 형 네 식구들과 함께 보내야 했기 때문에 혼자 누릴 수 있는 자유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음울한 생활로 나의 신세를 정당화 시켜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간이 약하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술로 밤을 삼을 정도가 되어갔다. 내 삶 가운데 지울 수 없는 암흑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술독에 빠져 익사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몸부림을 쳐야 했다. 대도시의 절대적 무관심과 소외는 둘째 치더라도 앞날이 안 보이는 막막한 세상의 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술과 일 그리고 쓸쓸한 밤을 넘겨야하는 고독감. 마치 돈을 벌려고 미국으로 온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생활 속에서 하루하루 죽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그로부터 연락을 받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의미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에겐 꿈이 없었기 때문에 실재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로 인하여 나는 다시 살아 날수 있었다. 그가 나에게 연락을 한 그날도 술에 만취한 보통의 날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미국 생활한지 4개월 째 되는 한밤중에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이려하니 고요한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형 네 식구들이 잠에서 깰까 걱정되어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실례하지만 최인철 좀 부탁합니다." 나는 기대하지도 않던 한국말이 상대편으로부터 흘러나왔기 때문에 가만히 듣고만있었다. "저는 강형규라고 합니다만 인철이 있습니까?" "형규?" "인철이구나. 서울 집에 연락을 하였더니 어머님께서 연락처를 알려주시더라. 그래서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하게 됐어. 언제쯤 오나 했더니 도착한지 4개월이 되었다고 하시더라. 그래 별일 없냐?" "거기 어디야? 형규." "맨하탄에 살고 있지. 너도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며?" "여태까지 뭘 하고 있다가 지금에야 연락을 하는 거야? 나는 우리의 관계가 끝난 줄 알았지." "갑자기 미칠 것만 같아서 하소연이라도 할까 연락했는데 그래 지낼 만 하냐?" "겨우겨우 살고 있지. 새장에 갖힌 것 같아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진데 언제 한번 만나자 우리." "지금 나올 수 없겠니? 오늘을 넘기면 또 한번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아서 불안하거든. 어때 시간 낼 수 있겠지?" "어디에 있는지 말해봐. 택시를 타고 갈 테니까." "그러지 말고 네 주소를 가르쳐주면 내가 차를 끌고 데리러 갈께." 나는 주소를 가르쳐주고 형규를 기다렸다. 그가 나를 찾게된 이유가 심상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짐작 가는 일도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면서 서로의 연락을 끊어 버렸기 때문에 형규의 근황을 추측하기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다. 갑자기 혼란해 지는 것을 느낀 나는 욕실에 들어가서 물을 뿌리고 나왔다. 술기운으로 정신을 차리기도 쉽지 않았지만 그가 연락 한 것이 흥분되었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형규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이내 형규가 도착한 것 같았다. 나는 옷가지를 챙겨 입고 그가 기다리는 로비로 내려갔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형규를 몰라볼 정도였다. 근육질의 건장한 체격의 그가 초췌한 몰골로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반갑게 나를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동명이인 이었으리라 믿을 정도였다. 형규는 나를 끌어안고 한참동안 가만히 말없이 있었다. 그의 침묵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필경 그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말하기를 좋아하고 사람들과 섞이기를 즐기던 형규도 나와 비슷한 생활로 인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깨가 적셔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형규로부터 예상 못한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하니 그가 측은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모른 척하며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였다. 형규는 눈물을 감추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수록 그의 애통이 전보다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왠지 허탈감에 젖어들기만 했다. 한참만에 형규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정리한 듯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나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정문에 주차한 그의 차를 향해 우리는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걸어갔다. 빨간색 스포츠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신형의 고급 차를 몰 정도라면 형규가 어떤 생활을 하고있는 지 짐작이 되었다. 우리는 형규가 몰고 가는 차 속에서 서로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먼저 말문을 여는 쪽이 패자가 되는 듯 그가 모는 차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난날 형규와 나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의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침묵은 과거의 그것과는 성질이 달랐다. 서로가 언어를 빼앗긴 벙어리의 처지였기 때문에 가슴이 터지도록 마음대로 지껄이고 싶은 것은 그나 나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가 모는 차가 east의 고급 아파트로 들어갔다. doorman이 나와 외부인사를 확인하는걸 보면 가히 짐작이 갈 만 하였다. 우리는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세운 뒤 엘레베터를 타고 그의 집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30층이 넘는 고층아파트의 27층에 이르러 승강기가 멈추었다. 복도로 나오니 고급 카페트가 깔려있었고 눈에 보이는 실내장식이 호텔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으리으리했다. 형규는 복도 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실내는 어두웠으나 눈앞에 펼쳐진 east river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는 손님을 맞으려는 준비를 미리 했는지 양주와 안주를 table 위에 올려놓았다. 우리는 재회의 변을 술로 대신 하였다. 마주치는 시선도 조금 전과는 달라졌고 한잔을 들이키니 과거로 돌아가기도 수월해졌다.

둘.
나는 형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자 철저한 타인이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대학시절 그의 집을 부리나케 드나들면서도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의 집에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시던 분이 형규의 친어머니라고 생각하였고 내가 보기에도 전혀 의심할 구석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축복된 가정에서 자란 건전한 친구라고만 믿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형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는 나의 짐작을 여지없이 허물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형규의 부모가 갈라서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형규는 그의 부모가 만나게 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형규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하여 고지식하면서도 매사에 화를 낼 줄 모르는 온유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가 음대를 졸업하고 떠오르는 피아노 연주자인 형규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 것은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사람들은 그들 남녀가 둘도 없는 천생연분이라 하여 서둘러 결혼을 하게끔 하였다. 형규의 어머니는 여자이지만 야망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결혼한 남편을 통하여 언젠가는 자신이 못 이룬 꿈을 남편의 출세로 보상 받고자 하였다. 남편이 출세를 하게되면 미루어 왔던 그녀의 야망을 다시 펼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왔기 때문에 남편을 위해서 부지런히 일을 벌리고 다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부터 다른 뜻을 품고 시작한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의 앙금이 쌓여 가는 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었다. 형규 아버지는 판사복을 벗어 던지고 변호사로 전업하였고 남편의 출세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형규 어머니는 허탈감에 빠져 말다툼을 자주하기 시작했다. 결혼의 전재조건인 사랑보다는 주위 환경이 빚어놓은 환상으로 맺어진 까닭에 두 사람은 결과가 뻔한 파국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었다. 마침내 형규 부모는 성격차이라는 이유로 헤어지게 되었고 얼마 후 음악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형규 모친과 홀로 남은 그의 아버지는 과거를 뭍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아내와 이혼한 그의 아버지가 다시는 결혼을 안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일년도 않지나 재혼을 하게 되었으니 감수성이 강한 형규는 내심으로 심한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학업성적이 뛰어나던 그가 방황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대학 진학에 실패할 것은 누구도 예측이 가능한 일이었다. 형규는 새로 들어온 계모를 그의 친모를 대하듯 의식적으로 열심을 다하여 행동함으로써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하였고 어머니의 성격과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온유함은 가정을 다시 평화로운 공간으로 만들어갔다. 형규가 친모로부터 연락을 다시 받게된 것은 군대를 제대한 83년이 되어서였다. 현지에서 미국인과 결혼한 그녀는 마지막 소유물이었던 형규를 다시 그녀의 근처에 불러옴으로써 외국생활의 절대고독을 떨쳐버리고자 하였다. 결국 형규는 녹슨 훈장과 같은 초청장을 받아들고 부친과의 또 다른 이별을 준비하여야 했다. 그러나 대학은 졸업하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부친의 권유로 85년 가을이 되어서야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된 형규의 과거는 일단 여기서 멈추고 말았다. 그는 여태까지 꺼낸 이야기가 서곡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 담배를 꺼내 물고 나서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였다. 우리는 벌써 어지간히 술로 익숙해 있었다. 형규가 준비해 놓은 양주병의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퍼 마셨으니 정신이 혼미하기만 하였다. 형규는 담배를 피우고 나서 다시 새 양주병을 들고 왔다. 그는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서 그가 겪었던 이곳 생활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점점 깊은 계곡으로 빠져가고 있었다."오늘 하마터면 큰일 저지를 뻔했지. 양코배기 친구와 대판 싸우고 나왔는데 중간에서 엄마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 친구 지금쯤은 이 세상과 연을 달리했을걸..."아마도 형규 어머니와 재혼한 미국인을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동양인을 동경하고있던 백인의 미국인은 조그만 체구의 형규 어머니를 만나서 그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였는지도 모른다. 중부에서 자란 그는 부모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맨하탄에도 여러 채의 고급 아파트를 소유한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성격이 난폭하였기 때문에 술만 들어가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횡포를 부리곤 하였다. 사실 형규만 그들 사이에 끼여들지 않았더라면 평범한 상류생활을 누렸을 지도 모른다. 장성한 형규가 그들의 결혼생활에 방해가 되었는지 백인의 형규 계부는 술을 핑계삼아 한번씩 터뜨리곤 하는 것이었다. 궁리 끝에 형규를 독립시킨 것이 한달 전의 일이었지만 가끔 어머니를 찾아가 저녁을 할 때마다 그는 형규를 하인취급하며 모멸을 하였던 것이다. 오늘만 해도 참아왔던 울화가 순간 폭발해 버린지라 형규도 그에게 완력을 쓰고자 했던 것 같다. 중간에서 난처하기만 하던 형규 어머니의 중재가 없었더라면 십중팔구 무슨 불상사가 벌어졌을 것이라는 형규의 말이었다. 그런데 심란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오니 재수 없는 일이 기다리기라도 한 듯 그를 더욱 곤란하게 하는 것이었다. 가정불화의 상식적인 문제와는 다른 진짜 고민이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그래. 여태까지의 일은 그런 대로 견딜 만 하지만 지금부터 털어놓을 이야기는 내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거든.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까먹다가 너를 생각하고 서울에 연락을 하였지. 그 덕분에 이런 식으로라도 만나게 되었으니 좌우간 반갑다. 인철아 미안하다. 진작에 연락을 했어야 하는 건데 벌레처럼 살다보니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려 했지. 차라리 한국에 남아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더라면 이런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나는 형규가 뱉어내는 한마디가 절규처럼 들려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미국 생활을 한지 4개월밖에 안된 나로서는 그의 말이 나의 뜻을 대변하는 것처럼 절실하였다. 환상을 제대로 파악 못한 실수치고는 현실이 너무나 냉혹하기만 하였던 것이다. 그가 털어놓은 형규의 이야기는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고 있었다. 부모의 이혼을 목격한 형규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친구를 따라 음성 써클에 관여하면서 그곳에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절에 만난 그녀는 형규에게 끔찍할 정도로 잘해 주었다.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생각했던 형규의 삶이 다시 궤도를 찾는가 싶더니 그녀마저 Canada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멀어지고 마는 것이 형규의 삶에 드리운 어떤 패턴과도 같은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떠난 그녀는 형규를 잊지 못해 그나마 편지로 연락을 계속하고 있었다. 형규의 재수시절에 한번 나들이를 하였지만 곧 Canada로 돌아가자 연락이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형규는 미국으로 오면서고 한 가닥 희망을 갖고 그녀에게 전화를 하게되길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형규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전화를 하였다. 바로 4개월 전의 일이었다. 연말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에 잔뜩 취해 전화를 하였더니 그녀는 다음날 형규를 찾아 NY으로 날아왔다. 멋진 한해의 마무리라 생각하며 형규는 그녀를 만난다는 설렘으로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녀가 던진 아픔은 현실을 달콤하게 바라보던 형규의 꿈을 여지없이 깨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를 태우고 무작정 달리고 있었다. 시내를 한바퀴 돌고 나서도 그녀가 전해준 충격을 감수하느라 여간 어렵지 않았다. 78년에 이민을 떠났던 그녀가 겪은 7년은 아마도 보통사람의 70년이나 되는 기간 같기만 하였다. 낯선 이국 땅에서 고독과 외로움을 달래다못해 결국 몇 달만에 고국을 찾아왔던 그녀. 그립던 형규를 만나 한번의 사랑을 나누고 언제라고 할 수 없는 내일로 서로의 추억을 묻고자 했던 그녀가 그냥 스쳐가기도 힘든 남을 만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는 허우대가 멀쩡한 사내를 그곳에서 만나 환상의 나날을 보내었고 사귄 지 얼마 안되어 몸을 섞게 된 후 급기야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하게된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형규와는 관계를 끊게된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난 후 현실은 독초보다 쓴 다툼의 세월이 되었고 두 사람의 인연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한지 3년만에 서로 갈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형규가 연락을 하였을 때는 갈라선 지 몇 개월이 안된 상태였다. 형규는 다시 한번 쉬어 가려는 듯 내게 술을 권하였다. 그리고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 버린다면 형규의 고민은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담배를 다 태우고 나서 한층 깊어진 고뇌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생긴 거야. ""무슨?""나야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까 그녀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거든.""4개월밖에 안되었다며 다시 시작하면 되는 일 아닐까?""이혼하고 깨끗이 떠난 줄 알았던 그자가 영실이를 잊지 못하는 거야. 더군다나 나와 그녀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운지 술만 마시면 그녀의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며 온 집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더군.""법적으로 완전히 끝나버린걸 가지고 뭘 그래. 행패를 부리는 일이라면 경찰에 연락하면 될텐데...""그런데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닌가봐. 별거를 하고 이혼수속을 밟고있는데 그자가 동의를 하려하지 않는 다는군. 싸인을 않는다는 거야. 죽일 놈이지!""형규. 그렇다면 손을 털고 나오는 것이 현명한 일 아닐까? 사람을 만날 기회는 앞으로도 많이 있을 텐데 왜 일부러 복잡한 일에 말려들려 하는지 모르겠군.""모르는 소리.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을 만날 수 있단 말이야? 그리고 전부터 알아온 사람을 쓰레기 버리듯 쉽게 처리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내가 그녀한테 연락을 안 했다면 몰라도 이제 와서 입에 쓰다고 뱉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지. 결국 일을 저지른 쪽은 나라고 할 수 있지.""그렇다면 구체적인 계획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을까?""그자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자구책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겠지. 오늘도 영실이가 울며불며 전화를 하지만 않았더라도 기다려볼 생각이었는데 가만히 놓아두기에는 성질이 고약한 친구 같아.""자구책이라니?""쥐도 새도 모르게 저 세상으로 날려버리면 어떨까?""유치하군. 궁리해낸 것이 그 정도라면 깨끗이 물러 나오는 편이 신상에 좋을 것 같군.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 해도 우리 생각 좀 해보자.""생각? 자네 지금 나한테 철학교육 시키는 것은 아니겠지? 하기야 인철이 너는 내가 겪은 아픔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객관적일는지 몰라도 나는 더 이상 사유 따위로 시간낭비 할 처지가 아니란 말이야. 이판사판 아니겠어? 세상 어디라 해도 죽는 것은 결국 한번뿐인데 두려울 것도 없지. 그 친구를 내 마음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미칠지도 모르거든."형규는 눈빛에 살기를 띠고 있었다. 현실의 오류로 무장된 상태에서 그가 벗어나는 길은 철저하게 미치는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형규가 그녀를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가 품고있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이런 식으로라도 풀지 않으면 더 큰 폭발이 그를 몰락시킬 것만 같았다. 형규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당장 토론토로 달려갈 작정이었으나 한번쯤 생각도 없이 달려가면 필경 무슨 일을 저지를 것같이 전화를 끊고 나를 찾게된 것이다. 그러나 나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인생의 방해자라는 결론을 내린 탓인지 만나보지도 못한 그자에 대한 증오심으로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지금의 형규는 과거에 내가 알고 있던 그는 분명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 보이는 나의 모습도 그처럼 변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치 NY의 공기가 사람을 서서히 미치게 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개월밖에 안된 나의 NY 생활도 따지고 보면 형규의 삶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가공의 대상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며 술로 하루를 보내는 나라고 해서 미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파행적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불안하였다. 형규의 생각이 술김에 뱉어내는 넋두리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성격으로 보아서 언젠가는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가 겪은 고뇌를 형규에게 털어놓으려 하다가 그의 아픔만 더할 것 같아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형규의 삶에 비하면 나의 푸념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싫건 좋건 형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나약하게 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애꿎은 술병을 비우며 그 밤을 세우고 말았다. 나는 친구를 되찾은 기쁨과 어쩌면 그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징조가 뒤범벅되어 혼란하기만 하였다. 다시 한번 이국의 낯선 도시가 강요하는 절대고독을 맛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술독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셋.

감금 생활 같던 형네 식구들과의 나날을 청산하고 학교 근처의 아파트를 찾아 독립한 것은 여름이 열리기 시작한 6월이 되어서였다. 형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니 일단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게된 셈이다. 나는 형규의 배려로 여자를 소개받아 그나마 외롭지 않은 독신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지 교포인 그녀는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이었으며 당돌할 정도로 자기 주관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부모로부터 학비를 받는 것조차 신세로 생각할 정도였으니 그녀의 완벽주의를 상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대도 나에게는 갖은 배려를 보이며 접근해 왔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녀가 고맙기만 하였다. 아르바이트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을 돕고있는 그녀는 내가 만나왔던 어느 여자보다 개성이 강한 편이었다. 그녀로 인해 내 생활은 차츰 변해 가고 있었다. 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설득하여 독립하게 한 것도 그녀의 생각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만 보면 답답해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피해의식을 해소하려는 그녀의 노력이 마침내 형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게 하여준 것이다. 나는 그녀를 행운의 여신이라 믿고 싶었다. 때문에 그녀를 잃게되면 모든 행운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쌓여도 그녀에게 털어놓으면 눈 녹듯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면 그녀의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녀로 인해 술을 마시는 양도 줄이게 되었으니 갑자기 세상이 연인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았다. 형규를 만나서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지 않던 것도 그녀를 만나게되면 최면이라도 걸린 듯 속마음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형규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생각대로 풀리지 않아 답답해하였지만 지난번과 같은 극언은 스스로 삼가는 편이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여도 결국 참으라는 소리밖에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형규 자신이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며칠 후면 미국에서 처음 맞는 나의 스물 여섯 번째 생일이다. 나는 모처럼 형규와 행운의 여신을 나의 공간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기로 하였다. 일을 일찍 마친 그녀가 약속시간을 지키느라 서두른 것 같았다. 안에서 법석을 떨던 나는 행운의 여신을 보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직 여섯 시밖에 안되었는데 서둘러 왔군 그래.""인철씨 생일에 내가 거들지 않으면 도울 사람이라도 또 있나보지? 음식 솜씨를 함부러 자랑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자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하는 수 없지 뮈!""형규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연락이 서로 안되었나 보군 그래.""형규씨는 급한 약속이 있어서 조금 늦겠다고 했어. 7시까지는 온다고 했으니까 음식준비 하다보면 제시간에 오겠지 뭐! ""그 친구 나한테는 연락 없더니 다해 생각은 끔직히 하는군. 다해 조심하라고,""내가 전화했어. 인철씨 surprise해 주려고 연락한 것이니까 질투하지 말아. 그나저나 형규씨가 잊지 말아야 할텐데...""뭔데 그래?""지금 말하면 재미없으니까 자꾸 묻지 말아. 어차피 알게 될텐데 뭐!"다해는 비밀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제법 콧노래를 불러가며 흥겨워하였다. 나는 그녀의 곁에서 시중이라도 들어줄 요양이었으나 다해는 한사코 나를 밀어내며 부엌 점유권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나는 멋쩍게 응접실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녁 준비를 대충 마치자 다해가 부엌에서 나왔고 이어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가 된 것이었다. 다해는 형규가 온 것으로 짐작하고 상대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문 밖에 서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형규와는 거리가 먼 아름다운 젊은 여자였다. 곱게 차려입은 그녀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싱싱한 생선회를 들고 서 있었다. 다해는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나서는 문 앞에 서있는 그녀를 향해 신경질 적으로 물었다."누구시지요? 혹시 집을 잘못 찾은 것은 아닌가요?""최 인철씨를 만나러 왔는데 안에 계십니까?"다해는 그녀의 예상이 빗나간 것을 확인한 순간 얼굴이 하얗게 변하여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우리 사이에는 풀 수 없는 오해가 생기기 시작하였고 나는 어쩔 줄 모르고 난처하게 그 순간을 넘기려 안간힘을 썼다. 어색한 분위기로 한참 동안 그대로 서 있는데 마침 파킹을 하고 오는지 형규가 나타났다. 그는 문 밖에서 야릇한 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형규는 아무 내색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형규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문 밖에서 기다리고 서있던 그녀도 형규의 웃음소리를 신호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놀랜 쪽은 다해였다. 허락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집안으로 들어서고 있으니 어쩌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형규가 다해에게 말을 걸어올 때까지 그녀는 당황해서 몸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다해씨가 상당히 놀란 모양이군요. 인철이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내가 초대한 사람이니까 이리 와서 서로 인사나 나누시지요."다해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형규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문을 닫고 소파로 와서 앉았다. 그러자 형규가 서로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영실씨 이쪽은 내가 제일 아끼는 친구 최인철이고 아까 문 앞에서 만난 사람은 Tracy Kim이라고 하지요."형규의 소개가 있자 우리는 그 동안의 오해를 풀고 한바탕 웃음의 바다로 헤엄쳐 들어갔다. 형규는 내 생일을 기회로 영실씨를 자연스럽게 선보이려 했던 것이다. 덕분에 다해로부터 약간의 오해는 있었지만 우리는 이내 한데 섞여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형규의 말대로 영실이라는 여자는 매력적이었으며 우수를 간직한 그녀의 얼굴에는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신비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가까워질 것 같지 않던 다해도 영실과 오래 만난 사이처럼 친숙해져 있었다. 형규가 사온 샴페인으로 우리는 술잔을 부딪쳐가며 서로의 관계를 축복해 주었고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하며 나의 생일을 함께 나누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나서 얼마의 시간을 보낸 형규와 영실은 나와 다해에게 둘만의 시간을 준다고 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그것이 내가 송영실이라는 여자를 보게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다. 다해와 나는 둘이 남아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그들의 앞날을 걱정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영실이 NY까지 찾아온 것은 형규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그들의 관계가 쉽게 진행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해도 영실의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낼 정도로 그녀의 미모가 빼어난 것은 사실이었지만 영실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의 그림자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이 흉터로 변하여 영실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이 나의 생일이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형규가 저지를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예감하며 그 밤을 보내었다. 다해가 설거지까지 해주고 간 시간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홀로 남은 나는 미국에 와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해준 친구들에게 감사하며 그날을 정리하였다. 낯설기만 하였던 이곳 생활이 차츰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미국에 첫발을 디딘 지 7개월째 되어서야 운 좋게도 나의 길을 찾게된 것이 마냥 고맙기만 하였다. 음울하던 시간이 알 수 없는 외부 작용으로 인해 정상궤도에 진입한 것 같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불만과 혐오감으로 무장되어 있던 어제가 정상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하루하루 변해 가는 것이었다. 나의 그림자 같던 삶이 서서히 빛 가운데로 나오고 있었다.

넷.

기나긴 여름의 권태 속에서 벗어나 나도 마침내 소속감을 찾게 되었다. 대학원 등록을 마치고 분주한 삶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혼자일 때 느꼈던 외로움이나 고독을 붙들고 시간 낭비할 여유도 없었다. 낮 동안은 형네 가게에서 일을 돌보았고 밤에는 학문의 동산 근처에서 배회하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다. 형과의 관계는 변함없이 그대로 지속되었지만 어젠가는 그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형규와 다해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다른 도시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형규로부터 소식을 못 들은 지도 꽤 오래된 것 같았다. 형규의 근황은 다해로부터 전해들을 정도로 되었으니 그와는 또다시 거리를 두게된 것이다. 형규가 영실을 소개한 것도 3개월 전의 일이었으나 다해의 말로는 별 진전이 없다고 하니 그가 연락을 기피하는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형규는 완벽주의로 무장된 성격이었으나 영실과의 일은 그의 뜻대로 되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와 거리감이 생기는 것은 형규의 입장에서 보면 도리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런 격조 속에서 형규의 연락을 받게된 것은 11월이 넘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밤낮으로 몸을 혹사한 까닭인지 몸살기로 집에 일찍 들어와 쉬고 있던 금요일 오후의 일이었다.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 나왔다. 몸이 편치 않아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을까 하다가 상대편이 집요하게 전화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시큰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인철이구나. 나 형규야.""오랜만이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그 동안의 일은 만나서 나누기로 하고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내가 그쪽으로 찾아갈 작정인데 어떻겠어?""오늘은 만사가 귀찮을 정도로 몸이 괴로운데 나중에 만나는 것이 어떨까?""아주 급한 일인데 지금 만나지 못하면 영영 기회가 없을 지도 몰라. 나 지금 쫓기는 중이야.""뭐라고! 지금 어디에 있지?""너희 집 근처에 와있어. 지체하다가는 붙잡힐지도 몰라.""그러면 빨리 올라와. 밖에서 빈둥거리다가 잡히면 어떻게 해!""고맙다. 금방 올라갈께."나는 전화를 끊고 형규를 기다렸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사태가 심각하게 진전되는 것만은 분명 하였다. 나는 그가 올라올 때까지 안절부절못하여 방안을 서성거리며 온갖 불길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지가 한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로부터 소식이 없었다. 다해한테 연락을 하려하다가 형규가 나를 찾은 것이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같이 불안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형규가 내 아파트에 올라온 시간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이 다되어서였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서자 술을 찾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무슨 말로 시작하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나는 형규 스스로가 털어놓기를 기다리면서 그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으나 그의 행동이 내가 알고있는 형규가 아님은 쉽게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형편없는 피멍 투성이였다. 마침내 술잔을 다 비우고 나서 그는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어떻게 하면 좋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그놈이 하도 개판을 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그만...""형규. 침착하게 말해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단 말이야.""간밤에 해치우고 밤새워 달려오는 길이지."나는 그가 해치웠다고 하는 말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모르는 까닭에 형규로부터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형규는 술 한잔을 더 요구하더니 간밤에 있었던 일들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시작했다. 형규가 Toronto로 달려간 이유는 송영실의 생일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었다. 그 동안 그녀와 재결합을 위해 노력 한지도 일년이 가까웠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그녀의 부모와 담판을 짓고 별거중인 남편과도 신변정리를 하고자하여 찾아갔던 것이다. 영실의 부모를 만나 호의적인 반응을 받아내고 그녀의 생일도 멋지게 즐기고 있던 차에 그자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도 술에 만취하여 앞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형규와 마주치자 그자는 이성을 잃고 영실과 그녀의 부모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형규도 술에 취한 그를 부드럽게 대해 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온갖 욕지거리를 서슴없이 해가며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만히 참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형규가 그를 잡아 의자에 앉히려하자 그가 느닷없이 형규의 복부를 발로 차며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형규는 그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영실과 형규에게 입에 못 담을 욕지거리를 퍼부었을 때는 형규도 더 이상 이성으로 그를 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형규는 운동으로 단련된 솜씨로 그를 상대하려 하였지만 태권도 사범인 그에게는 역부족 일수밖에 없었다. 그가 형규를 일방적으로 몰고가자 두 사람은 부엌까지 밀리며 처절한 난투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형규는 그가 휘두르는 주먹에 얼굴을 맞고 싱크대로 쓰러졌다. 완력으로는 더 이상 상대가 안되었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과도를 등뒤로 숨긴 뒤 그가 다시 접근 할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그의 복부를 칼로 깊게 찔렀다. 그 순간에도 그는 형규를 붙잡고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형규는 그의 복부에 있는 칼을 빼내어 몇 번이나 더 찔렀던 것이다. 영실의 생일파티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아직도 숨이 끊기지 않은 그는 부엌 바닥에서 몸을 꿈틀거리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식구들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였다. 그나마 영실의 뒷수습으로 형규는 몸을 씻고 옷가지를 갈아입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형규는 Canada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오게 된 것이었다. 한밤중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형규가 시 경계를 벗어난 뒤에야 경찰에 연락을 하였을 것이라 한다. 형규는 밤을 세워 뉴욕으로 달려왔고 이곳에 도착하자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자 갈증이 나서 형규와 더불어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술로 목을 축이고 나서야 형규가 전화를 걸고나서 어디에 있었는지 궁금하여 생각 없이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나한테 전화 걸고 어디에 갔다 왔어?""집에 가서 옷하고 돈을 챙겨 가지고 나왔지. 아무래도 어디론가 몸을 피해 있어야 할 것 같거든.""어디로 갈 작정인데?""서부 쪽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그곳에는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몸 하나야 숨길 수 있을 꺼야.""앞으로 영실씨하고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지금의 상황으로는 이렇다 할 답을 못 찾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슨 해결책이 생기겠지. 경찰에 수배된 상태니까 그녀도 감시망에 들어있을 것이 분명 하거든. 가능하면 인철이 네가 중간에서 연락을 해 주었으면 해. 그래서 찾아 온 건데 영실씨 연락처를 남겨 둘 테니 네가 가운데에서 수고를 해야겠다. 너한테는 정착하는 데로 곧 연락을 할 테니 영실씨한테 걱정 말라고 전화라도 해 주길 바란다. 그렇게 해 줄 수 있겠지?""그야 어려울 것도 없지만 형규 네가 걱정이다. 도피 생활이란 긴장의 연속일텐데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어?""걱정할 것 없어. 어차피 혼자서 처리해야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구."말을 끝내자 형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모든 결정을 다 내린 듯 나를 부둥켜 안은 다음 밖으로 나가려 하였다. 나는 그가 걱정되어 어색한 말투로 그를 불렀다."형규! 어딜 가려 하는 거야? 내일 아침에 떠나도 될텐데...""아니야. 어차피 떠나기로 했으면 시간 낭비할 이유가 없지. 인철아 다시 연락할 때까지 건강하게 지내라. 미국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형규는 말꼬리를 감추며 문을 열고 쓸쓸히 사라졌다. 그를 기다리는 앞으로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나 형규는 예측이 불가능하였다. 내게 빛같이 밝음을 비추어 주던 그가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나는 빛을 잃은 그림자가 된 것 같았다. 형규는 언제나 나보다 한 발작 먼저 걸으면서 내 앞길을 수월하게 해 주었다. 제대로 걸은 길이라면 나를 이끌어 주었고 그 길이 어둠이라면 빗겨가게 하는 배려를 아낌없이 베풀어 준 형규. 그가 내 눈에서 사라지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형규는 꺼져가는 빛을 통하여 내 앞길을 비추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인생이 순탄할 수만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구책을 휘두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가를 그의 경우로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형규는 나에게 있어 변함없는 빛이었고 나는 그의 그림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래 전에 친구들이 이름지어준 그대로 내 삶은 형규로 인해 언제나 실수 없이 걸어갈 수 있었다. 강형규. 나의 빛이 점점 꺼져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섯.
대학원을 졸업하던 해에 나는 다해와 결혼을 하였다. 나의 아파트를 드나들던 그녀를 부모들이 걱정하던 나머지 내 졸업과 함께 서둘러 짝짓게 하여준 것이다. 내 방황의 나날은 이제 완전히 끝을 맺게 된 것이다. 큰형은 내게 거는 기대가 대단하였기 때문에 사업확장의 계획을 나와 더불어 진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혼까지 한 이상 형의 우산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는 앞으로 이곳을 벗어나기가 불가능 할 것 같았다. 다해는 내가 어려워하는 것을 알고 그녀의 친정이 있는 LA로 떠나자고 제안을 하였다. 경영학 공부를 마친 이상 야채가게에 만족하면 장래가 없을 뿐더러 형제끼리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LA에 가서 CPA 시험을 패스하면 새로운 삶을 누리는 데 아무 불편이 없을 것 같았다. 다해도 그녀의 전공을 살려 사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서부로 옮길 생각을 했다. 그러나 형규 때문인지 마음만 앞섰지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도피생활 2년을 맞게되는 형규는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연락을 하였지만 지난 4개월 동안은 아무 소식이 없던 차였다. 그로부터 연락이라도 받게되면 임시 연락처를 남기고 이사 할 수도 있겠지만 벌써 소식이 끊긴지가 오래 되었으니 궁금하기도 하였다. 가끔 연락을 하여도 공중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이 고작 이었지만 그와 이런 식의 통화도 나누지 못하게 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생활의 변화 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88년 연말이 되어 영실씨한테 연락이 왔다. 보통은 내가 먼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이번만은 그녀가 내게 소식을 알리기 위해 전화를 하였던 것이다. 다해가 그녀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내게 전화를 건네었다. 다해의 표정으로 보아서 일상적인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전화를 받아들자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우선 그녀를 달래기 시작하였다."영실씨. 무슨 일 입니까?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십시오. 영문을 모르니까 불안 하기만 합니다.""형규씨한테 편지 받았나요?""저하고 소식이 끊긴지 꽤 오래 되었는데 잘 있다고 합니까?""그것이 그만...""영실씨 진정 하세요. 연락을 받았다면 그 친구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동안 소식이 없다가 안부를 확인 할 겸 편지를 했을 텐데 도리어 잘된 일이지요""그게 아니라 형규씨가 자살한 것 같아요. 저도 오늘에야 편지를 받았거든요. 일주일 전에 써서 보낸 것 같은데 그 동안에 일을 저질렀을 것 같아요. 자신을 잊어버리고 새롭게 살아가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인철씨한테도 연락을 하지 않았나 확인해 보려고 전화를 한 거예요. 인철씨도 편지를 받았나요?""아닙니다. 저는 그런 소식을 받지 못했습니다. 연말이라서 우편배달이 늦어지는가 봅니다.""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러니 혹시 편지를 받으시면 꼭 연락해 주세요. 참, 늦게나마 두분 결혼 축하 드려요. 결혼식에 참석해서 축복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전화로 대신해요.""고맙습니다. 그리고 형규한테 편지 받으면 곧 연락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마음 편하게 갖고 생활에 전념하도록 하십시오. 불길해 하지 마시고 말입니다.""인철씨 고마와요. 그러면 이만 끊을게요. Happy new year! " "영실씨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나는 전화를 끊고 다해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나의 뜻을 짐작한 듯 아무 말 없이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형규가 보냈을 편지를 기다리며 드디어 해를 넘겼다. 그로부터 편지가 없는 것이 도리어 고마왔다. 편지를 받게되면 영실씨가 우려했던 걱정이 현실로 확인되는 것이었으므로 언제까지라도 편지가 배달되지 않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새해가 되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던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기는 하였지만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흰눈은 삭막하기만 해지는 도시의 정경을 정겹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지난 몇 년 동안을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해와 하나가 되어 첫눈을 맞게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다해와 나는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우리의 앞날을 계획해 보기도 하였다. 금년 안으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형규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더라도 이제 그에게서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해가 형규의 자리를 대신한 이상 빛을 찾아다니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형규에게도 나에 대한 의무감을 벗겨주고 싶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발은 며칠이 계속되어도 그치질 않았다.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하늘도 땅도. 장을 보고 들어오던 다해가 편지 한 장을 내 앞에 내보였다. 발신인의 주소는 없었으나 직감적으로 형규가 보낸 편지임을 알 수 있었다.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편지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그만 목소리로 숨을 조리며 읽어 내려갔다.
나의 빛과 같던 친구 인철에게.
인생을 마감하면서 지난 날 들이 생생하기만 한 이유는 아마도 나의 삶이 너무 극적이었기 때문이리라. 돌이켜 보면 한 순간도 순탄하지 않았던 시간 속에서 너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으며 가장 큰 기쁨이었다. 세상 누구한테도 거짓으로 감출 수 있어도 너한테만은 최선을 다하여 살아 보고자 노력한 이유는 친구이자 빛이었던 인철이 너때문이었다고 믿고 싶다. 너의 염려와 배려로 피신생활을 하였지만 결국 내가 바라본 삶은 실패의 점철이었음을 이제야 깨우치게 되었다. 사랑을 위한 도피였다면 이처럼 괴롭거나 허무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를 떠나서 하루를 보내야하는 고독이 밤마다 나를 고문하며 미치게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일이었다. 영실이를 멀리에서라도 바라볼 수 있다면 쫓겨다니는 나날을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고 싶지만 아무도 반겨줄 사람 없는 이국의 감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치는 것을 보면 겁이 나서 못 견딜 것 같다. 악몽으로 나는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밤마다 나를 찾아 나타나는 그자가 내 목을 조여오는 꿈을 꾸곤 한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나는 그자를 피해서 도망 갈 수 없는 나는 아침이 되면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오한을 느끼곤 한다. 이쯤 되면 오갈 데 없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하나밖에 없게 된다. 더 이상 구차한 삶에 연연해서는 안될 것 같다. 나를 염려해 주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그 짐을 벗게 해 주고 싶다. 지금 금문교에 걸려있는 석양을 바라보며 술 한잔을 비워가고 있다. 너와 영실에게 마지막 몇 자를 남기고 나의 길로 가려한다. 한번 쉬었다 가는 인생 이제 홀가분히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지치고 무겁던 육신을 벗어 던지고 그냥 돌아간다. 여태까지는 떠밀려 왔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나의 의지대로 진실되게 따르고 싶다. 그 동안 여러 가지로 고마왔다.
너의 친구 형규.
p.s. 태평양으로 넘어가는 낙조가 극치를 이룬다. 오늘 같은 날은 죽는다는 것도 멋진 일 같다.
형규의 편지를 읽는 동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한 순간 진실로 생을 끝맺는다는 말에 나는 온몸이 동상처럼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을 마감하면서 까지 그림자인 나에게 빛을 전하고자 했던 형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편지를 붙들고 그대로 있었다. 다해가 곁으로 와서 나를 껴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창가로 걸어가 눈 내리는 설경을 바라보았다. 하얀 눈망울이 점점 변해가더니 형규의 얼굴을 만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가 터질 듯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눈앞에 나타났다. 한 줄기 빛이 그의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여 섯.

4월이 되어 우리는 봄의 꿈을 안고 LA로 이주하였다. 나는 드디어 형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 후 절대적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형규의 몸부림대로나도 한번쯤은 진실 되고 싶었다. 그가 남긴 빛의 여운을 떠올리며 나의 그림자 같던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199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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