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 27일 월요일

2008 여행일지


10월 4일(Sat).
신동근 집사가 집으로 왔다. 성실한 그의 성격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찍 서둔 까닭에 우리를 안심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인 아침 8시 45분에 픽업하러 온 것이다. 운전 내내 순식구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예지네 가게와 조주양형제의 개업예배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순으로 이끌어 가는 신동근 집사의 모습에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항에는 비행시간 3시간 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여 한적하고 빠른 Check-In을 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Gate로 온 우리는 앞으로 펼쳐질 여행일정을 생각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환전소 앞을 지나는 아내가 일본돈으로 미리 환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기에 내 생각에 일본 현지의 환율이 더 우호적 일 것 같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공항 내의 가게를 둘러보던 아내가 내 주위에 앉아있던 일본인 내외와 대화를 시작했다. 요긴한 정보를 알려고 시작한 대화가 위급시에 연락을 달라고 eMail 주소를 전해받는 사건으로 진전했다. 친절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민족성이랄까? 하여튼 동경에 사는 이치로와 미키 내외의 친절과 처음 만나는 사람을 향한 배려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아내가 우리 사이에 빈 좌석을 두고 자리를 예약했기 때문에 비행시간 내내 여유공간이 있어 안심이었다. 또 덤으로 오른쪽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승객의 Entertainment Monitor 작동이 시원치 않아 결국 자리를 옮긴 까닭에 우리는 기내 좌석4개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번갈아 가며 다리를 쭉펴고 드러누워 모처럼 몇시간씩 눈을 부칠 수 있었다.


여행에 앞서

여행은 설레임.
사랑은 육체적이기에 앞서 정신의 엑스터시
몸으로 바깥 세상을 만나기 전
생각은 흥분과 함께 온 세상을 구경하였기에…
비행기에 몸을 맡기는 순간
나는 세상의 끝까지 달려왔다.
지금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덤으로 받으리…

비행기에서


10월 5일(Sun).
東京 成田 공항 도착.
공항에서 입국 절차를 마친 후 JR Pass 교환과 신주쿠 역까지의 직행 기차표를 구입했다. 공항의 첫인상은 청결과 정돈이었고 사람들은 친절하고 친근했다. 공항에서 본 일본 젊은 아이들의 Fashion은 각자의 개성을 따르기 보다는 전체 적으로 부조화에 가까운 유행과 우리들이 보기에 이상한 트렌드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일본 젊은이들과 한국 젊은이들을 구별하는 것이 쉬울 듯했다.
JFK 환전소에서 일본돈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1 당 10옌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었다. Narita Express를 타고 신주쿠로 향한다. 차창을 통해 드러내는 교외의 모습은 한국의 공항근처라고 해도 이상 할 것이 없었지만 간간이 보이는 일본식 기와 지붕이 이곳을 일본이라고 호소하는 듯했다. 현지 날씨는 예상보다 훨씬 더웠고 찌부둥한 하늘이 간간이 빗방울을 뿌린다. 항상 일본에 여행을 하고 싶었던 이유는 선친께서 일본을 다녀와서 조립장난감과 모터 탱크를 사가지고 오셨던 40년 전의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신주쿠 역에 도착하여 예약한 호텔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역원의 잘못된 정보 때문에 일시적 착오는 있었지만 아내가 공항에서 수집한 책자의 도움으로 목적지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에서 내려 남서쪽으로 5분정도 걸었다. 호텔 건물의 깨끗하고 웅장함에 비교가 될 정도로 숙소는 아주 작았다. 문을 통해 큰 여행가방 끌고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미국과 비교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는 않겠지만 사람 몸과 가방이 나란히 들어 가기에는 구조적으로 너무 협소한 입구였다. 결국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몸을 돌린후 가방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방은 작았지만 실내는 깨끗하고 32”의 LCD TV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가볍게 몸을 씻고 호텔 주변의 전통 일본 라면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좌석이 20개 정도도 안되는 가게에서 노인의 서브를 받는다. 왠지 전통과 역사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라면은 맛이 더 정갈했고 식사 내내 생라면의 국수가락과 국물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여행의 여독을 풀기에는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생각같아서는 저녁부터 동경사냥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눈이 무겁다 못해 아프기까지 했다. 아내도 생각이 같은지 호텔로 복귀하고 싶어했다. 동경 정복기(?)는 내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같다. 첫 날부터 무리하다가는 여행의 끝까지 여독을 몸에 지니고 다닐지도 모를 일이다. 아쉽지만 첫날은 휴식이 최고 약일듯 싶다.

短想

몸이 공중에 떠있는 것같다.
눈이 무거운 까닭에 思考의 명료가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동서의 차이가 공간의 문제만은 아닌 듯
육체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휴식은 숨가뿐 호흡.

10월 6일(Mon).
上野 공원
아침부터 빗방울이 떨어진다. 호텔에서 내려다 보이는 신주쿠 출근인파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마라톤 선수들같이 수백명의 인파가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며 출근길에 오른 모습은 마치 전장터와 같은 느낌이었다. 지휘관의 신호를 기다리는 전투병들의 모습이 이것이 아닐까?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호텔 근처의 멕도날드로 갔다. 주위 환경이 아직 익숙하지 않았고 아침 식사를 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의 Breakfast Meal을 시켜서 2층으로 올라갔다. 우산을 접고 자리를 잡은 사람들의 모습에는 부산함이 나 번거러움이 보이질 않는다. 일상에서 벗어나지않은 반복된 습관이라고 할까?
빈자리를 찾아 자리에 앉았지만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 미국의 도서관보다 훨씬 정숙하고 학습열에 가득한 이곳을 누가 멕도날드라고 하겠는가? 우리는 평상시의 대화 볼륨보다 낮추어 거의 Mute에 가까운 소리로 속삭일 수 밖에 없었다. 식당에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조심스러운 이들의 문화.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출근 빗길의 우산부대 인파를 좌우로 헤치며 신주쿠 역으로 들어갔다. 야마데 라인을 타고 우에노로 향한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기차와 전철로 일상 생활을 하기에 조금도 불편함이 없는 시스템에 무언의 동의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기차에 오른지 25분 쯤 후 우에노 역에서 내렸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익숙한 우에노 공원을 직접 방문한다는 것에 왠지 감회가 깊어진다. 역을 나서자 예상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아무리 빗길이라고 해도 공원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너무 듬성듬성한 것이 이상했다. 공원 안내문에 휴일 표시가 있었지만 공원에 국한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서양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 앞으로 갔지만 우리를 반기는 것은 굳게 닫힌 철문뿐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공원과 더불어 부속시설 모두 월요일이 정기 휴일이었다. 주위에서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는 젊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도 우리와 같이 사전 지식 없이 무조건 공원으로 달려 온듯싶다. 빗길에 인적없는 공원을 아내와 한번 둘러보았다. 서양미술관을 돌아 오른쪽으로 나오는 중앙 분수대에서는 비를 맞으며 여러 모양의 물을 하늘로 열심히 뿜어내고 있었다. 이 분수대의 성실함이 일본인을 닮았다. 노숙자들이 서넛이 비를 맞으며 빈 벤치에 몸을 눕혀 잠을 청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어디를 가나 노숙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공원 밖으로 나왔다. 오른쪽에 불루 웨일의 대형 조형물이 있어 이곳이 자연사 박물관 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방향 감각 때문인지 아메요코 시장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침 가로변에 주차한 차들이 많이 있어 그 중의 한 차로 다가가 차창을 두드렸다. 초미니 봉고에 앉아 있던 중년의 남자에게 아메요코의 방향을 물으니 마치 준비라도 하고 있던 것 처럼 메모지를 꺼내 간단한 약도를 그려주었다. 짧은 영어였지만 언어보다 앞서는 마음의 방향계가 무엇보다 확실한 그의 안내였다. 수차 거듭하는 이야기지만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일본인들의 친절을 다시 경험할 수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무겁게 떨어진다. 아내가 감기에 걸린다고 나를 우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여행이 아내와 둘만 하는 여행이니 다행이다. 아이들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면 이것 조심하라 저것 조심하라는 주의 사항을 듣느라 아이들이 위축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비내리는 공원에서

대지에 입마춤하는 빗방울이
이방인의 활보를 축복하 듯
가랑비로 몸을 만진다.
비맞은 땅의 발자국 소리는
공간으로 사라지기 전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존재감으로 남아 기억의 동산을 걸으리

비오는 날
하늘로 물을 뿜는 분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우에노 공원에서



아메요코 시장
공원 옆자락에 붙어있는 아메요코 시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첫 느낌이 서울의 남대문 시장 그것이었다. 남산 공원을 내려와 시장으로 향하는 세팅이 일본 동경으로 옮겨온 것 뿐이다. 예전에는 이 시장에서 단 것(아메)들을 구할 수 있어서 명칭을 아메시장이라 했지만 2차 대전후 서울의 양키시장처럼 Black Market의 역할을 감당하여 American Goods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Ame 요코시장이라고 했단다. 여하튼 시장을 둘러보 기 시작했다. 장터의 곳곳에 빠친코와 큐브호텔이 있었고 세상의 모든 것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한 가게들이 장터에 즐비했다. 시장의 원래 명칭처럼 과자, 사탕 가게들이 많았다. 장터의 음식점들이 여간 정갈하고 보기에 맛갈있어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먹어 보고 싶었다. 아내가 조그만 가게로 들어가 구경을 한다. 나는 그 가게 옆에 있는 사찰(덕대사)에 관심이 갔다. 일본 불교가 현실 세계와 가깝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도 전통시장 한 복판에 사찰이 있는 것이 한국인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상인들과 손님들이 어느 때라도 사찰을 방문해서 기원할 수 있도록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는 일본 민족의 남다른 면모를 보는 것 같았다. 좁은 공간을 최적화 할 수 있도록 사찰 입구에 봉헌비가 2개 있고 계단을 오르자 말자 석조물이 급하게 눈 앞으로 다가왔다. 대웅전은 문전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협소했지만 경내에는 일본식 사당과 기원문을 적어놓은 조그마한 나무조각들이 게딱지처럼 줄에 메달려 정원 한 구석에 건축양식인양 서있었다. 일본 영화를 보면 사찰 장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형적이고 인상적 것이었는데 직접 목격하니 생경하기만 하다. 왠만한 가정집 규모에 오밀조밀 배치해 놓은 사찰이 구경꾼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찰을 드나드는 인생의 생각이 한 가지는 아니겠지만 생사화복의 틀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하는 것은 아닌지…


德大寺에서

성전에서 상인들을 몰아낸 주님이
장터 한 복판에 있는 이런 절을 보셨다면?
자신의 기원을 나뭇판에 써서 누구에게 구함인지?
전능하신 하나님께 감사.
누구에게 보이지 않아도 이루어 주시는 그분께.



10월 7일(Tue).
우에노 국립 서양미술관
전날의 실패를 만회하기위해 우에노 서양미술관 탐사 재도전에 나섰다. 날씨도 한결 좋았고, 동경 시내를 오갈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진 발길로 길을 나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드로크로와, 쿠르베, 밀레, 부댕, 마네, 모네, 피사로. 르노아르, 세잔, 고갱, 고호, 시냐크 등 유명 화가의 작품들이 두 세 작품씨 전시되어있었지만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한 Section보다도 작은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서 미국의 힘과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정신을 다시 한번 경험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부지런히 박물관을 찾기로 아내와 다짐을 했다. 모네의 수련 앞에서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몇분동안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였지만, 관내의 유료 관람 작품들보다 볼만한 꺼리는 박물관 정원에 있는 로뎅의 걸작들이었다. 입구 오른쪽 정원에는 지옥의 문과 그 좌우에 아담과 이브의 동상들이 있고 반대쪽 입구에는 생각하는 사람과 Burghers of Calais의 군상이 박물관의 격조를 높이기에 충분했다.
관내에서는 금지된 사진 촬영이었기에 바쁘게 손을 놀리며 사진 촬영에 들어갔다. 미술관 앞에서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증명사진을 한장 찍고 공원을 훑어 보았다. 눈빠른 아내가 기모노를 입고가는 일본 여인과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 그 일본 여인의 양해를 구하고 사진 한장 더.
오후 시내 관광을 위해 세계무역회관으로 달려갔다. 계단을 오르내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버스터미날을 찾았지만 정확한 장소를 핀포인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번 일본인의 친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역회관과 인접한 호텔 앞에서 일본인에게 관광 집결 장소를 물으니 직접 그 곳까지 안내해 주었다. 두가지 놀란 사항은 먼저 그의 성실한 친절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약도의 부정확함이었다.
일본인 관광가이드의 영어 설명이 시작되었다. 40층 무역센타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동서남북 사방이 거대한 빌딩군으로 덮혀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녹색의 듬성듬성 정원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반가왔다. 서울의 남산이나 인왕산, 도봉산 같은 산세는 찾을 수없는 평지가 강을 끼고 시원하게 펼쳐졌다. 한 마디로 거대한 도시의 숲이었지만 정리, 정돈된 감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전망대의 창문을 통해 시원한 동경 시가를 40여분에 걸쳐 조망을하고 이어 버스로 황궁앞까지 달려왔다. 도심의 빌딩숲 한 가운데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황궁은 상상한 것보다 더 한적하고 세심한 보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노송으로 장식된 주변 조경이 주변 환경을 더 고풍스럽고 일본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사방을 깊이 10M 가량으로 파서 인조 하천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침략에 대비하려했던 이들의 노고가 한눈에 보인다. 인조 방어하천과 고성벽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제국호텔 앞을 지나 대기해있던 버스에 올랐다. 가부끼좌와 긴자를 지나 우에노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토쿄 다운타운을 훑는다. 세계에서 제일 비싼 부동산 가격을 자랑하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백화점 거리였다. 뉴욕의 5Th Ave보다 도리어 규모가 클정도로 시민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화려함이 이곳의 특성이라고 할까? 도시 고가도로를 타고 아사쿠사로 향한다. 사찰의 초입에 마쓰시타사에서 기증한 雷門(Thunder Gate)의 커다란 랜턴이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동경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雷門랜턴과 사찰 초입에서 대웅전까지 좌우로 즐비한 가게들을 촬영한 동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곳은 상업화가 된 곳이다. 일본의 종교는 생활을 반영하는 듯하다. 종교가 경제와 떨어질 수없고, 실생활을 떠난 종교는 일반인의 호응을 받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이 곳을 찾은 인파 가운데는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현지인들이 축제와 일상의 일부가 되어 이 곳을 즐겨 찾는 것 같았다. 관광지라하여 턱없이 비싼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우는 한국의 정서와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한국의 관광기념품은 중국에서 수입한 조잡하고 조악한 것들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수제품의 아기자가한 소품들이 관광객들의 소비를 자극하고 있었다. 어제 오늘의 역사가 아니라 서비스를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민족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좌우에 펼쳐진 수많은 상점을 지나 외부와 획을 짓는 경내로 들어섰다. 사찰은 어둡다는 인상을 준다. 경내에 피워둔 향내가 코끝은 답답하게 한다. 수 많은 인파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적어서 보이지 않는 신에게 구하는 모습을 보라. 그것도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효험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10월 8일(Wed).
島屋(시마야) 여관
東京à 長野 à湯田中(유다나까)
10월 9일(Thurs.)
湯田中à長野à 名吉屋 à 京都
淸水寺
10월 10일(Fri.)
교토 시내 관광
10월 11일(Sat.)
미야지마
京都à 新大阪 à 廣島 à 宮島(미야지마)
10월 12일(Sun)
교토 à 도쿄 à 나리타

10월 13일(Mon)
서울 입성.
거의 하루를 소비하고 말았다.